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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을 위한 ‘완벽한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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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멈추지 않는 쪽이 편해

지난여름 나는 커리어의 전환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였다.
‘꼭 해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커리어 전환을 위해 이직이 필요했다. 채용 과정을 하나씩 밟으면서 더욱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가족에게 탈락 소식을 알렸다. 엄마로부터 ‘그동안 노력한 자신을 칭찬해주고 푹 쉬렴.’이라고 메시지가 왔다. 친한 친구들도 모두 고생했다고 좀 쉬라며 위로했다. 눈물이 찔끔 남과 동시에 '어떻게 쉬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쉰다'라.. 나를 위한 호캉스? 주말 내내 책이나 읽을까? 하지만 금세 그만한 용기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쉬라는 말은 왠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달리던 말의 눈가리개를 떼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다 멈추고 쉬는 건 너무 불안했지만 내면에 일어난 불안의 파동은 어떻게든 잠재워야 했다.
노트북을 열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보듬어줄 방법들을 하나씩 적어갔다.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을 한가득 지고 카페에 가는 대신, 당근을 물려주듯 나에게 새로운 목표를 쥐여 주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어떻게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지 '액션 플랜'을 세우는 게 역시나 마음이 편한 쪽이었다.
노션 앱에 쉬는 동안 하고 싶은 것들을 적었다.

Plan 1. 내 마음 알기

가장 먼저 세운 계획은 심리 상담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바로 예약할 수 있었다. 아직 상담을 받은 것도 아닌데 신청한 것만으로 성취감이 들었다.
몇 회에 걸친 상담에서 선생님은 내가 과거에 역경을 이겨냈던 경험을 복기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셨다. 그때 감정이 어땠는지, 그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하나씩 짚어나갔다. 이 과정을 통해 나에겐 여전히 극복할 힘이 있다는 걸 상기할 수 있었다. 항상 미래의 더 나은 내 모습을 기대하는 편인데, 과거의 나에게도 배운다니 신기했다.
쉼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왜 저는 쉬는 게 안되죠? 멈추는 건 불안해요" 사실 이 상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신청했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지가 나의 힘이라고, 목표 지향적인 20대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하셨다. 그 말이 참 위로가 됐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쉬는 게 불안한 나를 답답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에서 가장 놀랐던 건 내가 실패한 후의 넥스트 스텝을 생각해내는 데 몰두하느라 정작 실패에서 오는 감정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실패를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의지는 좋다. 하지만 현재 감정을 덮어 놓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한다면 멀리 갈 수 없다.마지막 상담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내 마음을 읽는 시간』이라는 심리학책을 샀다. 책에 ‘마음 챙김’이란 개념이 나오는데, 보자마자 내게 필요한 훈련이구나 싶었다.
책에서 말하는 마음 챙김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과정’이다. 마음 챙김을 할 수 있어야 부정적인 감정에 오랫동안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감정을 인식하는 게 마음 챙김의 첫 단계이다. 그리고 감정 인식을 위해선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슬픔'이라는 감정에도 섭섭함, 우울함, 서러움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중 내가 느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으며 커리어 도전의 실패에서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을 구체화해봤다. 주눅 듦, 속상함과 더불어 ‘배신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배신감을 느꼈구나. 회사가 날 뽑아준다고 약속했던 것도 아닌데 왜 배신감을 느꼈을까?
배신의 조건은 믿음이다. 나는 나의 노력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내가 나를 배신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남도 아니고 나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이거 진짜 슬플만하네’
‘하지만 노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 지난했던 도전 과정을 임할 수 없었을 거야.’
이렇게 스스로 꼬리 질문을 던지며 차근차근 내 감정을 수용했다.
다이어리에 필사한 인상 깊었던 문장
『내 마음을 읽는 시간 (변지영, 더퀘스트, 2017)』 읽는 중

Plan 2. 사람에게서 에너지 얻기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이 회복되고 나니 에너지를 충전해줄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만나서 에너지가 충전되면 외향인이고 방전되면 내향인이라고 한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확실히 에너지를 쓰는 편이기 때문에 만날 사람들을 더욱 신중하게 선택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두 종류였다. ‘새로운 사람'과 ‘익숙한 사람'. 새로운 사람에겐 통찰을 얻고 싶었고 익숙한 사람에겐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다.
내가 만난 새로운 사람은 이직에 도전했던 바로 그 직무로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분이었다. 첫 도전의 결과는 마음을 쓰리게 했지만, 그 직무를 정말 하고 싶었기 때문에 두 번째 도전도 있을 거라 믿었다.
지인을 통해 연락해 한 번 얘기 나눠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연락을 취할 땐 나도 만남을 통해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만남까진 꽤 용기가 필요했지만 실제 만남을 통해 직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그분 또한, 본인의 커리어를 내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흥미로웠고 재충전 되는 시간이었다고 말씀 주셨다.
익숙한 사람은 친구들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친한 친구 몇 명과 약속을 잡았다. 내가 겪은 역경을 간단히 털어놓고 상담에서 얻은 통찰도 나눴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과의 시간은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약간의 알코올과 맛있는 음식이 있으니 당연히 즐거웠다.
친구네 집에서 시켜 먹었던 서울 최고의 젤라또

Plan 3. 성취감 주기

우리는 무언가를 달성했을 때 성취를 통한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멈추는 대신 쉼의 계획표를 작성했던 이유도 나에게 가성비 좋은 성취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요리, 운동 같은 일상적인 태스크들도 잘게 쪼개어 목표화했다. 원대하진 않지만 인생엔 중요한 목표들이 참 많았다. 이를 달성해나가는 과정은 축 처진 마음에 활기를 주었다.
특히 결과가 즉석에서 보이는 요리는 쉽게 성취감을 주었다. 일단 전부터 사고 싶었던 에어프라이어를 주문했다. 세상에 에어프라이어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간단하지만 든든한 아침을 차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에어프라이어로 해 먹은 것
물론 망한 요리도 있었다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은 가끔 러닝을 한다. 동네에 호수가 있어서 거기를 더도 말고 딱 한 바퀴만 도는 데도 땀이 한 바가지다. ‘달리는 나'에 취할 때만큼은 잡생각이 없어진다. 진짜 힘든데 그래도 뛰고 나면 정말 뿌듯하다.
너무 좋은 사실은 놀면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안 해봤던 것, 안 가봤던 곳 위주로 놀이 활동을 엄선하면 된다. 지난주엔 처음으로 캠핑에 다녀왔다. 다가오는 단풍 주간엔 친구들과 처음으로 치악산에 가보기로 했다. 휴식기가 지나고 새로운 도전기에 돌입했을 때 잘 쌓아놓은 추억들이 힘이 되어줄 것 같다.
처음 떠난 캠핑

부지런히 쉬는 중입니다.

나는 조급한 사람이다. 이 ‘부지런한 쉼’도 쉬는 건 불안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또 목표 지향적이다. 휴식기이자 회복기에 이루고 싶은 새로운 목표들을 세우고 달성하며 나를 정비했다. 나에게 던져진 막연하고 거대한 슬픔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요리하는 사이 옅어졌다.
나는 리스트 만들기를 좋아한다(!). ‘완료함' 체크 마크가 주는 홀가분함이 좋다.
하지만 모두가 계획표를 만들 필요는 없다. ‘쉼의 방법이 나에게 진정성 있게 발현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쉼의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에 맞춰 차근차근 휴식기를 보내면 된다.
지금도 나는 계획표에 체크 표시를 남기며 부지런한 쉼의 막바지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쉬다 보니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워서 글쓰기도 리스트에 추가했다. 글을 쓰기 위해 몇 달간을 돌아보고 기억을 모은 것을 편집했더니 쉼의 기념품이 만들어졌다.
이 회복의 기세면 곧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상태가 될 테다. 그리고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다시 실패가 온다면 이 글을 꺼내 봐야겠다. 일단 지금은 ‘글쓰기'에 체크 표시를 긋고 홀가분함을 만끽한다.
소금 MBTI J 80의 4년 차 프로덕트 디자이너. 눈 깜짝할 사이 주니어 디자이너라는 방패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만 그동안 맨땅에 헤딩하며 누구보다 크게 성장했다. UX 라이팅, 마이크로 카피 등 글로 하는 UX 디자인을좋아한다. 멋진 디자이너보다 ‘진정성 있는 UXer’가 되고 싶다. @copypocket
책임편집. 노윤재
편집. 이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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