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와중에 이 배제와 혐오의 선봉에 서서 열심히 정치를 망친 윤석열의 당선 소식은 큰 고통과 절망입니다. 그러나 당선인은 기쁨을 누릴 시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절망을 자양분 삼아 고통을 끊어내고 새 시대를 만들 방법을 찾아 자신부터 바꿔내며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위가 낯설고, 얼굴을 드러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이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사람들이 결국 거리에 결집하게 만든 건 바로 그 고통과 절망감입니다. 우리는 자주 ‘그 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고 말합니다. 그뿐인가요,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뿐더러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정보교류를 하거나 동료를 만나길 상상하며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들을 모아 FDSC를 만든 날, ‘활동가가 될 생각은 없다'고 말했던 제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간 함께 했고, 함께 할 동료들의 얼굴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주 120시간 투쟁하겠습니다. ‘웃으며, 끝까지, 동료들과 함께.’
2022년 3월 11일 대통령 선거 다음날 기자들 앞에서 선언했다. 나만의 ‘영감탱 가만 안 둬’ 선언이었다. 취임식이 있던 5월 10일엔 ‘혁명이 후끈후끈’이라는 팀을 꾸려 “미국혁명가: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진화(American Revolutionary: the evolution of Grace Lee Boggs)” 상영회¹를 열었다. 100여 명이 ‘혁명이 후끈후끈’하게 하루를 보냈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그랬다. 사람들이 심상정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입금내역을 공유하고 있었다. ‘혁명이 후끈후끈’이라는 그림책이 밈처럼 RT를 탔다. 사람들은 자못 비장하게 일상을 지켜나가겠다 다짐했다. 그런식으로 내 피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저항감이 들기 시작했다. 일상을 살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가? 그 날 그 장면들은 우리가 일상을 그냥 그대로 산 결과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상을 지킨다는 말이 더 싫었다. 현상유지를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을 유지하면 현상유지만 되는 게 아니다.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한다. 그러니 일상을 살면 안되었다. 그래서 영화를 틀었다. 혁명(revolution)이란 재진화(re-evolution)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다룬 영화를.
나의 위치에서, 나를 재진화시키는 일상의 혁명
나는 말 뒤에 숨기는게 별로 없다. 믿는대로 말했고, 뱉은 말엔 책임진다. 이건 내 도덕이나 양심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증오와 원망을 기반으로한 내 생존 본능에 가깝다. 이걸 인정하는데 2024년의 한분기를 몽땅 써야했을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지만… 요약하자면 그렇다. 나는 나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를 죽이지 않으려면, 나는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나는 이제 이것이 내 착시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동반사처럼 몸에 새겨진 강박은 쉽게 떨쳐낼 수 없다. (이런걸 트라우마라고 한다는 걸, 그제야 배웠다.) 이건 내게 큰 동력으로 작동한다. 나는 정말로 일상의 모든 부분을 바꿔나가며 살고 있으니까.
10시즘 일어나는게 일상이었다면, 요즘엔 10시에 자고, 6-7시에 일어난다. 일어나서 트위터를 보는게 일상이었다면, 요즘엔 물한잔 마시고 몸을 풀거나 가벼운 운동을 한다. 내 몸과 정신을 챙기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나쁜 일이 있을 때 무너지기 쉬우니까 그렇다.(그리고 사회적으로 나쁜일은 매일 일어난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책을 좀 읽다 자전거로 출근을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있지만 대중교통비를 올리면서 마치 대중교통 사용을 장려하듯 내놓은 오세훈의 ‘기후동행카드’가 너무 얄미워서 기후는 내가 더 동행한다는 생각으로 자전거를 탄다. 정확한 계기는 까먹었는데, 자본주의 구조에 저항하는 의미로 대학생때부터는 대기업 계열사의 제품이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는 소비하지 않으려고 해 왔다. 일부러 돌아가고 시간이 배로 들더라도 굳이 한살림과 같은 협동조합이나 동네 소규모 상점을 이용한다. 가계부를 매주 쓴다. 가계부는 나에게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자본의 흐름을 바꾸는 방식을 고민하는 문서다. 예를 들면, 후원금을 매년 조금씩 늘리는 것을 목표로 쓰는데, 새해가 되면 어떤 단체에 추가로 정기후원을 할지 나만의 기준을 정립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니 좋다. 키친 타올이나 물티슈가 생활 필수품이었는데 제로웨이스트 개념을 알고 나서부터는 행주를 비누에 빨아 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론 해외여행도 잘 안간다. 비행기로 지구를 망치는게 싫기도 하고, 여행 자체가 제국주의적 여가활동이라는 걸 알게된 이후로는 갈 이유가 납득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이전엔 SNS 타임라인을 아름답거나 참고할만한 레퍼런스로 채웠다면, 지금은 내가 모르는 투쟁 지역의 사람들로 채운다. 그래서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트라우마를 검색해도 ‘트라우마 문화를 비판하는 좌파 학자의 인터뷰’로 빠진다. 이런 일상에 대해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내가 자기를 욕한다고 생각하거나(?),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피곤해하는 기색이 태반이라 평소엔 다른 핑계를 대고, 말은 잘 안 한다. 나에겐 이건 편의성의 문제도, 생활의 윤택과도 관계없는 정신과 신체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돌봄이기에 양보할 것도, 피곤할 것도 없는 생활이다.
앞서 나열한 원칙들은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틀어온 일상의 모습이다. 그랬더니 점점 명백해졌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게. 자전거를 타고, 협동조합을 이용하고, 요리하고, 행주를 빨고 등 내가 나를 잘 재우고, 먹이고, 씻기고, 생활을 정의롭게 유지하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잘 쉬려면 출근은 주 3일 정도만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것이 불가하다면 누군가와 함께 살며 그런 유지 노동을 나눠해야 한다. 일단은 혼자 살고 있으니, 일하는 방식이라도 다 바꿔야 했다. 나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으니까. 그래서 프리랜서처럼 1시쯤 출근해 일이 없으면 5시, 많으면 10시에 퇴근하는 패턴을 정리하고 출근시간을 10-7으로 고정, 금요일엔 반일만 일한다. 야근과 주말 근무는 절대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살고, 부득이한 상황에만 한다. 그러려면 클라이언트와 업무 일정 소통을 확실히 해야 하니 견적양식, 타임라인, 계약양식, 프로젝트 세팅 다 바꿔야 했다. 무리한 부탁을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조율할 수 있는 다양한 소통전략을 실험하고 축적시켜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단호하고 강단있게 행동할거라 오해하기도 하지만, 실은 더 사려깊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을 계발하는 일이었다. 상대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이해해야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에게 최선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니까말이다. 내 창의력은 디자인을 할 때 보다 이럴 때 더 많이 쓰인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라고 말하고 다닌게 있으니 일하는 과정에서 부정의한 부분은 없는지,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다. 사회적 소수자 당사자인 창작자나 관련 주제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틈틈히 리서치 해두고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만든다. 캠페인 사례는 물론, 사회운동이 어떻게 조직되고 어떨 때 실패하는지 공부하는 것도 근 몇년새 내 업무와 일상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사회가 내 왼쪽 뺨을 때려? 내 오른쪽 뺨 때릴 땐 존나 다른 일이 생길것이다…
일상을 바꿔낸다는 건, 다시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 나로부터 흐름을 바꿔낸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랑 카페에서 만나는 사람은 스타벅스에서 만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카페 주소를 보내면서 거기서 만나자고 하니까. 나에게 프로젝트를 맡기면, 요즘 유명하고 뜨는 혹은 내가 학연/지연/혈연으로 알고 있는 창작자라는 기준이 아니라 리서치를 통해 찾아내거나 상황과 맥락에 맞는 창작자와 일하게 된다. 그런식으로 관행으로 지탱되는 구조가 틀어지게 한다. 그래서 나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건 나만 변화하는게 아니라, 내 주변도 같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걸 알면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할 때 유용한 생각은 ‘나같은 사람이 천만명 있으면 어떨까’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른 사회가 펼쳐질 것 같다면? 나부터 그렇게 튜닝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순전히 ‘신념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말했듯이 이건 내 강박이다. 이건 내게 큰 괴로움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내 일상을 뒤흔들만큼.
2015-16년은 나에게 중요한 해이다. 새로운 눈(관점)과 새로운 감각을 획득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활동가이자 기록가인 홍은전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것을 한방에 무너뜨리며 오는 앎’²이 있던 해였다. 정수리에 번개가 내려 꽂히는 것 같은 시간이었는데,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나 2025년이 다가오는 건 나에겐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무도 뭐라고 안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아줌마가 페미니즘을 위해 뭘 했어요!!!!’라고 하면 뭐라고 하지?하면서 혼자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심판의 날’이 진짜로 다가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뿌듯하게 침대에 누웠는데, 전혀 잠들 수 없는 메시지 알림이 온 것이다. “여기다 써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계엄 선포라니.. 너무 무서워요..”. 그때부터 새벽 2시까지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이하 FDSC)’ 슬랙에서는 900개가 넘는 메시지가 오고갔다. 나는 오마이TV와 소리가 안나오는데 계속 뭐라고 말하는 개무서운 이재명 라이브를 틀고 트위터와 슬랙 채널을 오가며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애썼다. 돈암동 집에서 여의도까지 버스가 다니는지, 그게 안되면 자전거로는 얼마나 걸릴지, 택시는 가 줄지… 지도앱을 만지작 거렸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슬랙에서는 두려움을 나누다 뜬금없이 사랑 고백을 했다. 계엄해제 가결을 생중계로 보고서 나서야 제정신으로 살려면 자야만 한다고 나를 설득하며 눕혔다.
2시에 누웠는데도 그간 노력해서 맞춰놓은 생체시계 덕분에 7시에 눈을 떴다. 그리고는 바로 트위터를 열었다. 명상이고 나발이고. 빠르게 훑어내려가던 타임라인에 노무현의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을 빌려 ‘아, 이게 리터럴리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니’라는 농담이 보였다. 나는 그 말이 무지막지하게 썼다.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커뮤니티를 운영한다고 말해왔는데… 그날 밤 ‘조직된 힘’은 없었다는 성적표를 받은 것 같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얼어붙었던 감각은 #ㅇㅇ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와 박근혜 탄핵 시국 앞에서 꼼짝못하고 얼어붙었던, 2015-16년의 그 무력감과 똑같았다. 내가 한심해서 갑자기 엉엉 눈물이 나왔다. 농담처럼 떠올린 ‘심판의 날’이라는 말이 무겁게 날 짓눌렀다. 일상을 살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다. 그러곤 일상을 바꿔오며 알게된 것들을 되짚어 보았다. 이런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 활동가들은 뭔가 하고 있을거라는 것.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오매에게 텔레그램을 남겼다. “오매님~!! 바뿌시겠죵.... but FDSC가 할일 없을가용????” 오전 11시 10분. 23분 후 회신이 왔다. 16분 후 확인을 했다. FDSC 슬랙에 글을 올렸다. “오늘 당장 디자인 가능한 디자이너 모집합니다 #계엄뒤질래 방에서 기다릴께용………..” 오전 11시 53분. 12시 15분 줌으로 활동가들과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 퀴어- 네트워크’라는 연대체 이름을 짓고 액션을 논의하는 회의를 했다. 회의 직후, 마케터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 ‘뉴그라운드’에 문구를 다듬고 편집해줄 사람을 구했다. 3시, 문구 11개의 편집을 완료하여 디자인을 시작했다. 5시, 이 디자인을 외부에 공개하고 오픈소스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용하기로 했던 출력기가 말썽인것을 알게 되어 급하게 인디고 인쇄를 맡겼다. 오후 6시 30분 우리는 16종의 피켓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이게 바로 안티페미니스트 정치의 말로”, “페미니스트가 요구한다 윤석열은 물러나라” 2종의 현수막도 펼쳐 들었다. 그리고 2024년 12월 4일부터 2025년 4월 5일까지 13개 조직의 연대체인 우리,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 퀴어- 네트워크(민구페퀴)’³는 광장에 섰다. 탄핵 선고 직후 한바탕 난리를 친후에 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또 엉엉 눈물이 나왔다. 시발 내가 이번엔 다르게 해냈구나, 심판의 날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눈물이.
24년 12월 4일 광화문과 25년 4월 5일 광화문. 민구페퀴 텔레그램방에서 쌔벼옴.
너 주변에 ‘다시만난세계’있냐?
일상을 틀어버린다는 건 세상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넓어진 세상은… 그만큼 좋다. 세상아 왜 이걸 말 안해줬냐 싶을 정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계속 새로운 숙제가 내 앞에 떠오른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그렇다. FDSC에는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라면 모름지기 지켰으면 좋겠는 행동강령이 있다. 거기엔 참여한 사람의 크레딧을 명확히 기재해 주자는 항목이 있다. 자꾸 실무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 디자이너들이 지워지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민구페퀴 활동에 참여한 사람의 수를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어디까지 참여했다고 크레딧에 기재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민구페퀴 활동이 일어나는 FDSC 채널엔 지금 101명이 들어와있다. 공개 배포하는 구글 드라이브엔 총 238개의 디자인 파일이 올라와있다. 더불어 우리는 누구 한 명의 이름이 이 활동을 대표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페미존을 알리는 공통 상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디자이너 여럿이 붙어 동시에 작업해서 하나의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 디자인의 목적은 탄핵을 요구하는 광장에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활동가들과 초안을 함께 쓰고, 문장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또 그런만큼 디자인이 드라이브에 있는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광장으로 이 디자인을 옮긴이들의 역할도 만만치 않게 크다. 초반에 활발히 활동한 디자이너들이 있는가하면, 텐션이 떨어진 후반부에 한달여간 팀을 이뤄 집중적으로 작업한 디자이너들이 있다. 광장에 나오지 않은 디자이너들이 있는가하면, 디자인은 안했어도 광장에 나와 깃발을 흔든 디자이너들이 있다. 개인적 사정으로 참여는 못해도 SNS등에 이 활동을 알린 디자이너들도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 우리 활동을 경유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데 도움을 준 이들도 있다. 인터뷰에 응하거나 글을 쓴 이도 있다. 그런만큼 우리는 디자인을 경유하여 광장에 참여했지만, 디자인을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호명이 필연적으로 누락을 수반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행해져야 할까?
더불어 이번에 활동하며 ‘순수한 개인’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주목을 받고, 그러지 않은 경우… 그러니까 활동가로 보이는 경우 별로 주목을 못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떤 큰 조직의 대표성을 띈 인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일례로 내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총파업 참여 게시물을 올리자 바로 언론사의 연락을 받았는데 이상했다. 민구페퀴 활동에 대한 소회를 남긴 게시물이 공유도, 노출도도 훨씬 더 높았는데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자가 자꾸 어떻게 이런 활동이 가능하냐고 묻는데 ‘내가 디자이너지만… 활동가이기도…해서…?’라는 대답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답을 하면 자꾸 다시 질문을 했다. 그게 답이 아니라는 듯이. 탄핵 선고 직후, 민구페퀴 활동가들 앞에 사진기자들이 있었기에 사진을 엄청 많이 찍혔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 피켓이나 깃발의 메시지가 온전히 드러나게 실린 국내 언론은 없었다. 내가 아는 활동가들은 그들의 역사와 맥락을 뗀 ‘기뻐하는 시민’으로만 등장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반대로 트위터를 통해 지혜복 교사와 연대하다 경찰에 연행된 개인들은 ‘시민단체 활동가’로 둔갑하여 보도되었다는 문제제기를 보기도 했다. 2월, ‘평등을 여는 수요일’ 집회에서 나는 ‘순수한 시민 여러분! 우리 모두 불순한 활동가가 됩시다!’라고 발언 했는데, 이는 사회가 적극적으로 활동가들을 고립시키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서 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왜냐면 민구페퀴 활동을 중간 회고하며 나온 공통으로 나온 주요한 말들이 바로 ‘서로의 얼굴을 알게 된게 큰 힘이었다’였기 때문이다. 4개월간 광장에 나가는건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계속 할 수 있었던건, ‘아니 저기도 나오는데, 우리도 나가야지’가 강력하게 작동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광장에 우리들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과, 그사이 서로 익숙해진 얼굴들 때문이었다. 말하는 중간 중간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저 문장의 무게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강력하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연루된 만큼 사회 변혁을 위한 활동들이 힘을 받을 수 있다는 뜻. 다시 말해 우리가 목격한 세상이 미디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현장의 활동가들의 고립으로 이어진다면, 그만큼 심각하게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경복궁에서 경찰이 트랙터를 갈취하려고 해 급하게 사람들이 모인날, 시위 출석율이 낮았던 내가 말벌아저씨처럼 튀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도 텔레그램방에 새벽 5시에 남겨진 ‘오매가 다쳤으니 와달라’는 메시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출근준비를 하다 말고 뛰어나온 아저씨의 발언을, 김밥을 먹으며 멍을 때리는 사람을, 앞에 나와 플룻을 부는 사람을 보며 웃었다. 기자회견 때문에 온 사진 기자가 그 와중에서도 지쳐서 잠든 사람이나 고개를 푹 숙인 사람들만 집중적으로 찍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했다. 그가 우리가 지치고, 고통받고, 힘든사람이어야 하는 것 처럼 그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시위에 참석하는 사람이 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이. 내가 목격한 세상을 증언하고 싶다. 내가 무지 귀찮은데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영감탱 가만 안 둬
일상의 활동처럼 미미하고 의미없게 느껴지는 일도 없다. 나 하나가 텀블러 쓰고 쓰레기 줍는다고 지구를 지킬 수 있겠냐는 말이다. 지난 4개월이 각별하게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런 의심이 사라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12월 4일에 울다가 오매에게 연락을 해서 미친 디자인 파티를 열게 된 것도 평소에 일상을 틀어 활동가들의 생태에 더 가까이 갔고,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에서 마케터로 일해온 김키미는 이런 활동은 처음이라 그를 연루시킨 나에게 자꾸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물었는데, 내가 ‘그냥 해. 아무도 너한테 대답해줄 사람없어.’ 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그게 진짜였다고. 서울에서 활동가들과 결합하여 민구페퀴 활동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대전에서는 정은지가 대전페미니스트연합에 합류해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건 우리가 그간 서울과 지역 디자인에 대해 고민해오고 활동해 왔기 때문이었다. FDSC 디자이너들은 문구를 전달하면 빠르면 30분, 늦어도 2시간 안에 디자인을 척척만들어서 업로드 했는데, 이건 그들의 손이 빠르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공부하고 고민해오던 생각들과 문구들이 공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이 문구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 해석할 시간이 필요 없었던 거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도 빠르게 현장의 디자인을 배워나가기도 했는데, 일례로 12월 4일에 디자인 들고 나가서 보고, ‘마음은 알겠지만 디자인까지 어두우면 밤에는 잘 안보이니까 대비 크게, 밝은 색을 쓰자’ 라고 바로 배울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외부 디자이너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폼을 만들며 나는 꽤나 긴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후루룩 뚝딱 쓸 수 있었는데 그것 역시 그간 공부해 온 결과가 소화되어 나오는 거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FDSC 슬랙에서는 주접을 떨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긴장을 하고, 비장하게 굴면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풀고 싶었다. 이런 일은 일상적으로 친구와 수다떨다가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듯이 가볍게 해야 한다. FDSC 내부에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무력감을 느끼지 않고 이번 시기를 보냈다는 반응이 많다. 윤썩열 보고 있나? 내가 주 120시간 투쟁한다고 했지? 이게 그 결과다. 활동을 일상에 담아낼 수록 우린 무기력과 불안에서 벗어나 웃으며 버틸 힘과 동료를 얻는다.
탄핵 선고 이후, 정치권과 언론은 빠르게 대선국면에 돌입했다. 우리가 광장에서 듣고 본게 있는데 그런거 없었다는 듯이. 이게 너무 열받아서 할말이 없었는데, 김정희원은 그것은 “정치가 아니”며 “그저 현상유지를 위한 기득권의 권력투쟁일 뿐”⁵이라고 썼다. 맞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 아닌데 정치면에 자꾸 나오니까 헷갈리는 거였다. 그들은 기득권일 뿐인데 직업이 정치인이라서 정치하는 줄? 정치의 뜻은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⁶이라고 한다. 나는 그들로부터 정치라는 말을 빼앗고 싶어졌다. 권력을 빼앗아 나누고, 단단하게 유지하며, 다르게 행사할 것. 다시 만난 세계에서, 웃으며, 끝까지, 알게 된 얼굴들과 함께. 다시 내 일상이 바뀌려고 하고 있다.
[1] 신인아,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다큐멘터리 <어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이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2013) 상영회 후기”, 웹진 액트!, 2022년 7월 7일, https://actmediact.tistory.com/1730
[2] 홍은전, “동물적인, 너무나 동물적인”, 한겨레, 2019년 9월 2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8122.html
[3] 뉴그라운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꽃페미액션,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언니네트워크, 장애여성공감, 페미당당, 플랫폼C,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FDSC, FFF가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 퀴어- 네트워크’에 함께하고 있다. 자세한 소개는 https://mgfq.webflow.io/ 참고
[5] 김정희원, “광장을 계승할 대선 후보는 누구인가”, 한겨레, 2025년 4월 23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93939.html
[6]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028
신인아
13년 차 그래픽 디자이너. 고양이 마크니의 반려인이자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풍경’의 대표. 돈을 잘 벌고 싶은 반자본주의자로 늘 자아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다. 당한 게 있어서 어려운 말, 멋진 말 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가능하면 남들을 웃기고 싶어 한다. 어릴 적 꿈은 코미디언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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