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김수영, 김세린
현장 촬영: 김수영
사진 제공: 조민정
“이 작업 누가 했을까?”, “이 박스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 종이는 뭐지?”.
하나의 작업물을 가지고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수십 가지. [페디소 인사이드]는 디자이너 눈에만 보이지만 알고 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이다. 단순히 디자이너의 프로필과 포트폴리오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를 실무자의 입장에서 깊이 파헤쳐 보았다. [페디소 인사이드] 시리즈를 통해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페디소 인사이드' 두 번째 주인공은 프래그 스튜디오의 조민정 디자이너 입니다.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중인 조민정 디자이너
Q. 〈워킹 페이퍼 - 라이트Working Paper - light〉(이하 〈Working Paper - light〉)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Working Paper - light〉는 숨겨진 빛을 찾는 이야기의 아트북입니다. 프래그 스튜디오는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데, 아트북 〈Working Paper - light〉는 이 지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전기/전자 분야와 프래그가 잘할 수 있는 인쇄 분야를 결합했습니다. 실제로 작동이 되는 책을 모토로 만들었어요.
아트북 〈Working paper-light〉 사진.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Working Paper - light〉 작업은 프래그 스튜디오의 자체 프로젝트입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어느 날, MOKA(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 갔다가 인도의 타라북스라는 출판사 전시를 보게 되었어요. 타라북스는 인도 소수 민족의 이야기와 그림을 담은 핸드메이드 아트북을 제작하는 출판사에요. 인도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종이에 일일이 실크스크린을 하기도 하고, 직접 제본을 해서 아트북을 만들어요. 지역을 주제로 콘텐츠를 만들고 구현한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어요. 지역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구현한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어요. 우리는 을지로에서 활동하고 있고, 우리도 우리만의 콘텐츠로 지역 기반의 아트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프래그 스튜디오는 이전부터 전자회로를 활용한 전자 얼굴이라든지 구리테이프를 활용한 생일 카드라든지의 전자회로와 전자소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이 매체에서 빛을 구현하는 방식의 아트북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민정 디자이너가 소장하고 있는 타라북스의 책
전자얼굴 프로젝트.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구리테이프를 활용한 축하 카드.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자체 프로젝트의 시작을 묻는 것은 작업을 진행하는 ‘추진력'이나 ‘동기부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자체 프로젝트의 경우, 논의만 되다가 흐지부지되는 것들도 있어요. 하지만, 〈Working paper-light〉는 세 명의 공통사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어요. 때에 따라 둘 혹은 한 명만 하고 싶어 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셋 다 굉장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서로의 능력이 모두 필요한 프로젝트이기도 했고요. 최현택 씨의 경우 물리적인 구조를 잘 다루고, 이건희 씨의 경우 전자를 잘 다루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것들을 인쇄물을 통해 생산의 언어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고요. 셋이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감을 믿고 시작하게 되었고, 그게 이 프로젝트의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Q. 프래그 스튜디오 내에서 자체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요?
자체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이익이 크지 않더라도 누군가 하고 싶어 한다면 내부 회의를 통해 결정해요. 아이디어가 구체화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발전시켜요. 프로젝트에 대한 의지를 보는 거죠. 돈이 되는 프로젝트도 중요하지만, 창작의 욕구도 존중해요. 프로젝트를 하기로 하면 서로를 최대한 돕고요. 결국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Match (영상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Working Paper - light〉의 제작 과정이 궁금해요.
이 책은 많은 실험과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어요. 초반 단계에서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많이 집중했어요. 완성본은 함축적이지만 처음엔 동화 작가를 모셔 글을 쓰려고도 했고요.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태초의 빛은 거리의 빛이 되었고, 너의 침대 맡에 와서 너의 방을 밝혀주었어.’와 같은 식의 동화를 구상했었어요.
초반 단계의 스케치.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이야기가 처음 구상보다 표현적으로 단순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야기를 구성하던 초기 단계에 프로젝트 진행이 많이 정체되었어요. 내부에서 스토리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아도 된다 라는 의견이 있었어요. 양극의 의견을 논의하며 회의를 꽤나 여러번 했어요. 텍스트로 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서사 이해에 도움은 되었지만, 중심 소재인 ‘빛'을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었어요. 우리가 만드는 책에서 ‘빛’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이견을 조율하면서 이야기가 많이 삭제되었어요. 결국엔 ‘빛’을 찾는 힌트로써 단어만 남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처음엔 대단한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콘텐츠를 담는 것에 욕심을 냈고, 그러다 보니 ‘빛’을 구현하는 것은 나중 문제로 전락해 버리더라고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읽히길 바라는지에 대해서 다시 논의한 후에 방향을 정리했어요. 단어가 빛을 밝히는 힌트가 되고, 그를 통해 책을 감상하는 이가 스스로 이야기를 찾고 읽도록 설정했고, 이를 통해 경험 자체가 이야기가 되었어요.
Q. 각 페이지의 힌트가 되는 단어들은 빛을 밝히기 위한 동력으로 이해되는데, 페이지 구성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일단 빛이라는 고정된 주제에 맞춰 관련된 사물과 상황을 찾기 시작했어요. 빛이 있는 공간과 사물을 목록화하고 그 안에서 직관적인 것들을 골라냈어요. ‘빛을 밝히는 사람의 행위가 너무 현대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골랐어요. 사람의 행위가 주체가 되어 빛을 밝히는 식의 아날로그 한 방식을 선택하는 게 중요했어요. 휠을 돌려서 라이터를 켜고, 터치가 아니라, 줄을 당겨서 전등의 빛을 켜는 식으로요.
페이지 구성과 관련된 작업 파일들
Q. ‘직관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시는데, 어떤 의미일까요?
저희가 말하는 ‘직관적’이라는 것은 딱 봤을 때 ‘이게 이거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바로 유추할 수 있는 형태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직관'에는 경험이 필요해요. 꾸준히 학습되고 노출된 경험을 직관적이라고 느끼거든요. 구멍이 뚫려있으면 손을 넣어본다던가,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눌러본다던가 사람에게 내재된 심리를 활용해서 행위를 하게 하는 장치를 직관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Q. 직관적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까 〈Working Paper-light〉의 일러스트 톤도 말씀하시는 ‘직관’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일러스트 작업을 하면서 고려하신 부분은 무엇인가요?
일러스트 작업의 경우 초창기 아이디어와 최종 아이디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일러스트를 구상할 때 1950-70년대의 상업 광고를 많이 봤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광고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많지 않았기에 단시간에 한정된 페이지 안에서 많은 걸 보여줘야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기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더라고요. 거기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그림과 단어 말고 다른 것들은 배제했으니 이미지를 최대한 직관적으로 표현하려고 했고요.
표현 방식에서 고민이 생기면 많은 사람에게 더 익숙한 것을 고르는 식으로 해결했어요. 예를 들어 라이터를 그릴 때 일반적인 라이터와 뒤퐁 라이터 중 어느 것을 그릴까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뒤퐁의 경우 실제로 많이 보지도 못하고, 뚜껑을 열고 불을 켜는 식의 추가적인 행동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결국 형태와 방식이 좀 더 익숙한 일반적인 라이터의 형태로 그리게 되었어요.
라이터 구동 방식에 대한 페이지
은연중에 지역적 특성을 가미한 부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NIGHT’ 페이지 속 등대는 한국에 있는 등대를 그렸고요. ‘OPEN’ 페이지 속 대문 위 157E는 저희 스튜디오 주소인 을지로 157을 나타낸 것이에요.
Q.그럼 그림을 먼저 그리고 나서 불이 들어오는 방식을 고민하신 건가요?
네. 사물과 이야기를 먼저 설정한 후 기술 구현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게 저희가 일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일러스트를 그리고 어디에 불이 들어오게 할 것인지 설정했어요. 물론 구조에 맞춰서 일러스트를 조금씩 수정하기도 했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6개의 그림 톤이 맞춰졌어요.
입체로 구성된 전등 페이지.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전등의 경우, 빛이 넓게 퍼지게 하려면 무조건 입체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빛을 넓게 퍼지게 하려면 광원이 멀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등 부분을 입체로 구성했고요. 전등의 다리는 목선반(Wood spinning)라는 목공기법의 모양을 추가해서 보는 재미를 주기도 했어요.
이런 식으로 어떤 식의 그림을 그릴 것인지, 어디에 불이 들어오게 할 것인지 대략적인 계획을 먼저 세우고 그다음에 전자 소자를 삽입한다든지, 전기가 흐르는 길을 만든다든지 하는 순서로 진행했어요.
전선에서 구리 테이프, 전자 기판 실험 과정 전도성 잉크와 기판을 사용한 최종 모습.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생산을 위해 목업도 수 차례 만들고 다양한 실험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책의 형태나 방향은 정해졌고 일러스트도 어느 정도 완성된 후에는 대량 생산을 위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전선을 연결해서 전류를 공급했는데 연결하는 시간에 대한 문제가 있었고 구리 테이프의 경우, 전선보다 책이 얇아지긴 하지만 여러 번 넘기면 어느 순간 끊어지더라고요. 생산을 위해서는 다 해볼 수밖에 없었어요. 다 해봐야, 되는지 안 되는지 알게 되고 전원공급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때는 아예 다른 한 분을 프로젝트 멤버로 영입을 해서 그분은 계속 전류 공급과 관련된 실험을 하고 목업 만드는 일만 하셨어요. 문제가 발견되면 같이 해결책을 찾는 식으로요. 결국 가장 마지막 해결책은 ‘전도성 잉크’였어요. 전도성 잉크는 산업용으로 얇은 필름 등에 인쇄되기도 하고 펜이나 튜브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어서 아이들을 위한 교구로 직접 회로를 그려 피지컬 컴퓨팅 교육을 하는데 쓰이기도 해요. 언젠가 이걸 활용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써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전류가 흐르기에 적합한 종이도 제본 방식 및 인쇄와 연관이 있나요?
네. 이런 전도성 잉크는 보통 필름류에 많이 사용되거든요. 필름은 플라스틱이잖아요. 그래서 막연히 필름과 비슷한 종이라면 코팅이 된 종이를 써야 하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코팅된 종이는 저희가 구성한 이미지와 잘 맞지 않았어요. 디테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사용하고 싶은 종이를 리스트업해서 종이에 실험하기 시작했어요. 모조지, 인스퍼 같은 종이에 전류가 흐르는지 확인했는데 어떤 종이는 인쇄를 하면 어떤 부분에는 전류가 흐르고 어떤 부분은 전류가 흐르지 않더라고요. 처음 전류가 흐르는 부분의 도안은 길이가 길었어요. 길이가 길다 보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량이 될 확률이 높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전류가 흐르는 길을 짧게 나누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어요.
구리테이프를 사용하여 계단식 제본을 실험한 모습.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그럼 이 계단식 제본 방식을 찾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일단 상황이 명확했어요. 전기가 흐르는 길이 짧아져야 하고, 책의 두께와 비용에 영향을 끼치니 배터리는 무조건 하나만 삽입되어야 하고, 여섯 페이지 모두에 전원이 공급되어야 하는 등의 기준이 있었어요. 많은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다가 첫 페이지에 배터리를 부착하고 다음 페이지에 닿을 때마다 전원이 공급되는 방식을 시도해보았죠. 최종적으로 책을 넘길 때 닿는 면을 통해 전류가 흐르도록 하는 계단식 제본방식을 개발했습니다. 이 방법을 찾고 팀원 모두 너무 기뻤어요. 이제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특허까지 진행 중입니다.
전도성 잉크를 실크 스크린 인쇄한 샘플을 보여주는 조민정 디자이너, 전류 공급 페이지 시안
배터리 (영상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가장 기억에 남는 실패와 해결방법이 있었나요? 이 책을 만들면서 가장 프래그 스튜디오를 힘들게 했던 난관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었나요?
전도성 잉크는 실크 스크린 인쇄 후에 열 건조(구워서 말리는 방식)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종이가 줄어드는 거죠. 그래서 열 건조를 하지 않고도 전도성 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인쇄 방식을 찾아야 했어요. 덕분에 이공계 교수님들도 만났죠. 해결책은 딱히 없었고 정말로 열 건조가 필요한지 해볼 수밖에 없었어요. '열 건조를 해야 된다'라는 공식이 붙어있는 잉크였기에 여러 업체에서도 실험하기를 꺼려했어요.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업체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 생각하셨나봐요. 여러 군데 문을 두드려서 "열 건조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샘플 비용과 책임은 우리가 부담한다." 라고 설득을 하고 실험을 부탁드렸고, 결국 열 건조를 하지 않아도 종이에 잘 부착되어 있고 전류도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다만, 제작에 집중하느라 마음에 걸렸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전원이 공급되는 페이지가 손상되는 문제였어요.
〈Working Paper - light〉는 독자가 직접 건전지를 끼우면서 시작하는 책이어서 전원이 공급되는 페이지만큼은 쉽게 손상되면안 됐죠. 이 페이지가 망가지면 책 자체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여기가 찢어지면 무용지물이 되는거잖아요 그런데 종이는 언젠가는 훼손이 되니 찢어지기 마련이고요. 그래서 배송을 미루고 찢어지지 않고도 전도성 잉크가 인쇄되는 종이를 찾아 헤맸어요. 결론적으로는 전원 공급 페이지만 유포지를 사용하게 됐어요.
이때 이미 일차적으로 배송을 미룬 상태였고 연기된 발송일에 맞춰 발주를 들어가려고 했어요. 유포지 테스트 후에 발주를 넣으려는데 인쇄소에서 종이 한 면에 도안을 1개밖에 못 찍는다고 하시는 거에요. 샘플이라서 3개를 동시에 찍은 거지 제작에서는 그렇게는 안 된다고… 4절에 1개씩 찍어서 판수를 올려야 한다고요. 이대로 진행하되 2~3배 올라간 인쇄비를 지출하거나 다른 인쇄소를 찾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이미 옵셋으로 찍은 페이지에는 문제가 없으니 다른 실크 집을 찾았고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Working Paper - light〉의 계단식 제본.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Q. ‘전도성 잉크'를 사용해보고 나니 어떤 장단점이 있었나요?
전도성 잉크도 종류가 매우 많아요. 저희는 정확히 ‘은(silver)가루가 들어간 전도성 잉크’를 사용했는데요. 전도성 잉크는 종이처럼 전기가 흐를 수 없는 재료에 불이 들어오게 하는 효과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겠죠. 근데 ‘전도성 잉크' 자체의 특별한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원래 그 용도로 개발이 된 것이니까요. 오히려 〈Working Paper - light〉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테크 기술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저희가 만들고 싶은 책의 조건에 전도성 잉크가 맞았을 뿐이에요.
단점은 너무 비쌉니다. 1kg에 백만 원이라서(눈물) 본 프로젝트를 실험하고, 생산하기까지 잉크값으로만 6~7백만 원을 쓴 것 같아요.
당시에는 다른 걸 찾아볼 여유가 없었기도 했고, 은가루가 전기가 가장 안정적으로 흐르는 재료라 종이에 적용 가능한 최고 사양을 썼습니다. 지금은 단가 문제도 있어서 은 함량을 낮춰보거나 구리를 넣어보거나 해서 조절하려고 해요. 근데 함량에 따라 전류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재료를 선택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Q. 그럼 지원사업과 별개로 텀블벅 후원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원 사업을 받았다고 해서 저희가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고요. 텀블벅으로 마냥 돈을 모아야 한다기 보다는 이 책을 좋아할 소비자층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어요. 이전에도 텀블벅을 통해 프로젝트를 공개한 경험이 있었고 아트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을테니 홍보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솔직히 제작비를 모아야 한다는 목표가 강했으면 현재 최종 소비자가(60,000원)으로 펀딩을 올렸을 텐데 텀블벅에서는 거의 50%의 리워드 금액으로 펀딩을 시작했습니다.처음부터 이 책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지만 보고 5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할 것 같진 않았어요. 일단은 많은 사람에게 공개가 되고 반응을 봐야 다음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실물로 〈Working Paper - light〉를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진행했습니다.
Q. 앞으로 〈Working Paper〉를 시리즈로 이어가실 계획인가요? 다음 책을 위해 고려하고 있는 보완 요소들은 어떤 것이 있나요?
‘소리(Sound)’라는 주제를 고민 중이고, 모든 책의 제본을 저희가 직접 하기 때문에 주문받고 배송에 꾸준히 신경 쓸 여유가 부족해요. 〈Working Paper - light〉는 지속적인 생산이 맞는 케이스는 아닌 것 같아서 100~200권 정도 소화 가능한 범위로 주문받아 분기별 혹은 연별로 한정판으로 만들고 그해에 소진하는 방향이 낫지 않을까 해요.
Q. 프래그 스튜디오의 특징 중 하나는 늘 키트를 함께 제공한다는 것 같아요. 상품을 접하는 사람들이 직접 원리를 이해하고 재밌어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도록 경험까지 기획하고 디자인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 걸 ‘체험적 지식'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요즘에는 자기가 해보지 않았어도 여러 미디어의 간접체험을 통해 해본 것처럼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직접 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경험을 공유하고자 함도 있고요. 작품을 살 수 없으니까 소장할 수 있는 굿즈나 MD 상품을 만드는 것인데 그런 차원에서 ‘키트'를 선택했어요.
Q. 손으로 작업하는 경험이 세 분께 내재되어 있어서 ‘체험적 지식'을 긍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도 키트를 좋아하고, 직접 해볼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지는 시대이고요. 내가 시간을 내지 않으면 바빠서 지식을 얻기 힘들고요. 저희가 손을 쓰는 일에 대해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보는 경험이 좋게 각인될 거라고 여겨요.
그런데 충격적인 일도 있었어요. 미술관에서 초창기에 워크숍 했을 때 초등학생 아이가 나는 못 한다고 너무 쉽게 말을 내뱉는 거예요. 해보기도 전에 ‘나는 망칠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아예 안 하더라고요. 자기 손을 쓰지 않아요. 왜 이 친구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졌고 돌려서 물어보니 옛날에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대해 못생겼다고, 못 만들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기 때문이더라고요. 성인들도 자기가 하면 망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요. 그럼 저희가 망치면 뭐 어때요. 오히려 망쳐도 된다. 못해도 된다고 해요. 불 들어왔을 때 와~! 하는 건 있지만 불이 한쪽만 나올 때도 있고요. 그러면 “윙크하고 있네?!” 이렇게 얘기해요. “다른 거를 붙여봐요~” 이렇게. 어쩔 수 없으니까. 근데 그게 크게 엄청난 실패는 아니거든요.
손으로 만드는 게 이벤트가 되어버리니 가끔 한 번씩 해봤을 때 안된 경험이 너무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것도 해볼 수 있을 텐데. ‘완성'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해요. 예전에 학교에서는 실과수업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교과에 그게 없대요. 코딩이나 워크숍이 흥하고 키트나 교구를 만드는 게 잘 판매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만드는 경험이 좀 더 보편적이면 좋겠어요.
Q.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래그 스튜디오는 지역 상인들, 상점들과 상생하고 협업하자 노력하는 것 같아요.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지역을 기반으로 도움을 주고받은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음.. 여기가 아니었다면 절대 만들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거래를 트면서 지역 상인 분들을 통해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업무차원 외에도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려고 합니다. ‘블로그 글쓰기 소모임'을 열어 강사님을 초빙해서 블로그 관리법 같은 것도 알려드렸어요. 온라인상에서 자기 상점의 입지를 늘리는 게 그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저희는 쉽게 할 수 있잖아요?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게 사진도 촬영해드리고요.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없는지 고민하고 이 또한 비즈니스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요.
Q. 민정 님이 생각하는 ‘로컬'은 을지로에 한정된 건가요?
우리가 을지로가 아닌 곳에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거기에서 발견되는 무언가로 콘텐츠를 만들어냈을 것 같아요.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이 로컬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을지로가 너무 많이 언급되고 있어서 ‘시류를 타서 너희가 이런 거 하는 거구나' 하며 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어쩐지 가볍게 소비되는 것들이 우리가 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지금은 개의치 않으려고 하고요.
Q. 그럼 을지로가 많이 언급되고 있는 지금,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최근에 거절하는 것들도 지역과 관련이 있긴 해요. 기획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레트로한 감성의-’, ‘복고-’ 이런 부류의 레퍼런스로 배달의민족 을지로체가 있다면 꺼려지기는 해요. 개인적으로는 을지로체 자체는 좋게 봐요. 간판 글씨를 써줬던 누군가를 찾는다는 이야기인데 사장님들의 반응이 좋기도 했고요. 그런데 실제로 이 지역에서 사용된 것을 보니까 이상했어요.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부분이 아쉬웠고, 을지로라서 ‘을지로체'를 쓴다는 발상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요. 1차원적인 방식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입니다.
Q. 마지막으로 민정 님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자신을 홍보해주세요!
물성으로 풀어내는 기획력과 솔루션 제공이 장점입니다. 그래픽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물성을 다룰 수 있다는 게 강점이죠.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면서 산출물에 대한 빠른 예상이 가능해요. 알고 있는 것도 많아서 폭이 넓은 것 같고요.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는 시기이기도 해요(웃음). 돈은 있는데 무얼 만들지 모르겠는 클라이언트들에게는 그 예산에 맞춰서 역으로 제안해드리겠다고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을 때 일이 더 깔끔하게 끝나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물성이 생산될 때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다만, 제작비를 알려주시지 않고 일단 제안해달라고 하면 어렵습니다. ^^~
최종 결과물. (사진 제공: 조민정 디자이너)
프래그 스튜디오 홈페이지: https://prag-studio.com/
글쓴이 김수영
회사에 다니는 그래픽 디자이너. 팟캐스트 [디자인FM] 작가. 평소 궁금했던 디자이너들을 만나는 데 몰두해 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여성 디자이너를 알리고 FDSC 회원들의 성취감 고양에 도움이 되려 한다.
@sooyoung.ksy
글쓴이 김세린
그래픽 디자이너.
아직은 여러모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오래오래 해먹는 건강하고 멋진 할머니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선 끈끈한 연대가 필수라고 생각하며 FDSC를 통해 적극 연대하고자 한다. 많은 동료들과 함께 멋진 할머니 디자이너가 되는 그날까지!
@serinww
책임편집. 김현중
편집. 최지영, 노윤재, 김나영, 이예연
FDSC에서 발행한 다양한 글이 보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