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것
졸업 후 직장인이 되면서 삶의 구조가 바뀌었다. 일주일 중 5일을, 야근까지 포함해서 하루에 10~12시간씩 타인과 한 공간에서 일하는 환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꿈이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디자인을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였다. 하고 싶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때때로 좋은 결과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이 주는 성취감은 나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줬다.
돈 받은 만큼 일하고 끝내면 참 좋을 텐데, 이상하게 내 디자인이 내 자아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무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작업물이 안 좋은 피드백을 들으면 내가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크리틱은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일 뿐인데, 냉혹한 평가만 오갈 때도 많았다. ‘솔직하게 말해서’라는 말은 객관적인 평가처럼 보이는 마법의 단어로 사람 마음을 후벼 파는 평가 앞에 붙곤 했다.
디자인은 작업물을 완성해서 대중 앞에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무수히 많은 고민 끝에 간결하게 나온 작업물 앞에서 누군가는 '이 정도는 나도 하겠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만큼 전문성을 온전히 인정받기 힘들다. 보는 사람의 느낌과 취향만으로 결과물을 평가하듯 말하고, 심지어 그것이 유효한 피드백이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디자인을 계속해도 될까? 나는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는 거 아닐까?’라는 질문을 했다.
Die for design
이런 디자이너의 마음을 이용하듯 업계에서는 때때로 말도 안 될 정도의 몰입 상태로 일하길 강요하고 있다. 디자인 에이전시나 스튜디오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과로 이야기는 업계에 뛰어들기도 전에 겁먹게 만든다. 새벽 4시까지 시안 작업을 하고, 주말 출근을 5주 연속하지만 대체 휴일을 받지 못하는 업계의 분위기는 개인에게 디자인을 위해 죽을 듯이 일하라고 한다.
어떤 디자이너는 상사에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업무 태도를 지적받으며 “디자인을 위해 죽을 수 있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디자인 업계에는 두 가지 집단밖에 없는 건가. 일을 위해 당장이라도 죽을 기세인 사람들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그 중간 지점은 정녕 없는 건가. 그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했다. 과로사할 정도로 일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맡은 일은 잘하고 싶었다.
업무 태도와 디자인에 대한 안 좋은 평가가 쏟아지며 어느 순간부터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 심각한 수준으로 자책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모자란 게 아니라 그들과 맞지 않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비로소 자기혐오를 멈출 수 있었다. 내가 처한 환경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인 점은 그때 나 자신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불행의 틀을 깨부수고 나오고 싶었다. 최근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 경우 상담받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좋은 현상이지만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담에 대한 문턱이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이라면 다들 이 정도는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다른 선택지를 찾아보고자 했다.
마음도 운동이 필요해 (왈이의 마음단련장)
문득 인스타그램을 하다 지인이 명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명상이라면 내 마음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 있게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프라인 초심자 반을 등록했다. 왈이의 마음단련장은 초록색 대문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한 카페트에 연녹색의 벽이 나를 반겨줬다.
‘왈이의 마음단련장’은 ‘명상'에서 획 하나 뺀 즐거운 ‘멍상'을 제안한다. 밀레니얼 세대의 문법에 맞게 ‘멍상'이라는 마음 운동으로 우리 마음이 아프기 전에 튼튼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instagram.com/wal.8am
‘숨, 감각, 연민’이라는 제목의 네 달짜리 멍상 코스를 진행하며 처음으로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위로해줄 수 있었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멍상을 통해 ‘아는 것'과 ‘잘 대해주는 것'은 다르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그중에서도 ‘연민 명상’이 기억에 남는다. 연민 명상의 주제는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심판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나를 연민하기였다. 심판자는 내 마음속에서 내 행동을 계속해서 평가하는 존재를 뜻한다.
나의 태도 중 바꾸고 싶은 것 중에 게으름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매일 방 정리를 안 하고 미룬다거나, 휴일에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심판자는 나에게 ‘한심하다’고 얘기했다. 심판자는 때론 나를 집어삼켰고, 일기에 종종 ‘오늘 아무것도 안 했다. 난 쓰레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라는 말을 적었다. 하지만 게으르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쉬고 있다, 아무 생각 안 할 수 있다'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너무 바빴기 때문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던 거고, 잠시 쉬면 오히려 편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심판자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치열하게 지내왔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오고, 다시 게을러지고, 다시 치열하게 지내는 상황을 반복해왔다. 그렇다면 내 안의 심판자는 왜 ‘한심하다'고 했을까? 심판자는 내가 더 잘되었으면 좋겠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만약 내 안의 심판자가 무조건적으로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괜찮아, 그 정도면 됐어. 나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와 같이 말했을 거다.
타인이 나에게 한심하다고 말하면 괴로우면서, 스스로에게 꾸준히 그 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당황스러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한심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상처 주는 말이니까. 그런데 그 말을 나 자신에게 평생에 걸쳐서 해왔다는 것이 얼마나 자학적인 일인지 깨달았다. 스스로에게 ‘한심하다'라는 비난의 언어를 통해 발전 동력을 삼았던 것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언어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4개월 동안 들었던 멍상 가이드 중 ‘스스로 해하지 말 것'이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습관적으로 자학적인 말을 많이 하고 동력이 되기도 한 터라 갑자기 생각을 멈추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말로 내뱉거나, 적어 내려가지는 않으려고 한다. 남한테 하지 못할 말은 나에게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를 제일 친한 친구처럼 소중히 하려고 한다. 멍상을 하며 스스로에게 ‘이대로 충분히 괜찮다', ‘이미 잘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다독여주는 방법을 터득했다. 남이 나에게 해줬을 때 위로되고 편해지는 말을, 내가 나에게 직접 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매주 멍상을 마무리하며 써 내려갔던 멍상 일지를 엮어서 노트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기록들을 흩날리는 종이로 두는 게 아니라, 한 곳에 묶어서 기록된 내 변화를 지켜보고 싶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와 다르게 꽤 건강해진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왈이네 멍상 노트를 만들었다. 그간 멍상을 위해 왈이네 마음단련장 문을 열 때 마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초록색 문을 표지로 만들어서, 내 마음속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표현했다.
멍상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Trial Audio 1개를 넣어놨다. 지금도 나는 매일 아침을 멍상하며 시작한다. 하루를 내 의지로 보낼 수 있다는 기쁨,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울 기회가 있다는 감사함을 함께 경험해보길 바란다.
나의 일상과 루틴을 시각화하는 도구 (컬러루틴키트)
왈이네 멍상 노트는 얼마후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줬다. ‘나의 일주일, 루틴 컬러로 그려보기', ‘내가 좋아하는 휴식 리스트 만들기’, ‘휴식 박사 과정' 등 일상과 휴식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라이프컬러링 유보라 대표님이 우연히 왈이네 마음단련장에 있던 멍상 노트를 보게 되었고, 휴식의 중요성을 아는 디자이너와 함께 툴킷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에게 협업을 제안하게 되었다. 보라 님은 ‘나의 일주일, 루틴 컬러로 그려보기' 프로그램에서 사용할 툴킷을 함께 개발해 볼 것을 제안하였고 그렇게 ‘컬러루틴키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툴킷을 만들기 전에 ‘나의 일주일, 루틴 컬러로 그려보기'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했다.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케줄러, 휴대폰 사진첩, SNS를 통해 기억을 더듬으며 마커로 색칠해나갔다. 하루 동안 사용하는 시간을 6개의 카테고리로 나눠보니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에 퇴사하고 쉬는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노는 시간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었다. 습관적으로 시간을 알차게, 디자이너로서 자기 계발을 하면서 보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래스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시간, 온전히 휴식하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식이란 무엇일까? 처음으로 휴식이라고 느끼는 행위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나에게 휴식이란 독서, 운동, 영화 보기처럼 생산성을 살짝 곁들인 영역으로도 있었고, 산책, 덕질하기, 친구와 대화하기와 같이 비생산적인 영역으로도 있었다. 휴식의 사전적 정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쉼'이지만, ‘나는 현재에 머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있는 즐거운 시간’이라는 꽤 큰 범위로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 이 소중한 시간들을 ‘노는 시간'이라고 말하며 불편한 마음을 갖기엔 아쉬웠다. 노는 시간과 휴식하는 시간을 구분하고, 새롭게 명명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프로그램을 듣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다이어리를 쓰듯이 일주일을 그려볼 수 있는 다정한 도구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낱장으로 그려지던 컬러 루틴을 6개월 동안 일상의 기록을 담을 수 있는 노트로 만들었다. 노트를 통해 매주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어떤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지, 언제 가장 소진되는지, 컬러로 칠하면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행위는 내가 습관적으로 자주 하던 ‘아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네' 하는 생각에서 멀어지고, ‘오늘 이런 것들을 했구나' 하며 스스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도와준다.
노트와 함께 자신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세 가지 도구를 만들었다. 첫 번째는 ‘Q&A Tool’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인터뷰 읽기를 좋아한다.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어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인터뷰해보면, 자신의 생각을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된 10개의 질문에 답변을 쓰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 초록색 잔디밭 같은 색상의 카드 봉투는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준다.
두 번째는 ‘List Tool’이다. ‘나의 일주일, 루틴 컬러로 그려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나만의 휴식 리스트가 생긴 것처럼, 키트 사용자도 주제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고 리스트를 갖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리스트 툴을 만들었다. 총 20개의 주제로, 메모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신만의 리스트를 채워 넣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노트의 키컬러는 사람의 기억력과 연관성이 있는 비비드한 보라색을 채택했다.
마지막으로 ‘Chart Tool’은 일주일을 카테고리별로 정확히 몇 시간을 썼는지 궁금한 마음을 해소해준다. 얼마만큼 일하고, 얼마만큼 쉬고 있는지 일상의 비중을 시각화해보면 예상외의 답이 나오기도 하기에 사용자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일상을 다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량적으로 나타나는 수치들은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완화시킬 수 있도록 노트의 표지는 포근한 하늘색을 사용했다.
컬러루틴노트를 사용해볼 수 있는 Tiral Page 1장을 넣어놨다. 이 도구를 통해서 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휴식하는 방법을 찾은 것처럼, 다정하게 일주일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글을 마치며..
성과 사회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진된다. 책 『피로사회』는 우리가 저마다의 노동 수용소 속에서 스스로를 착취하며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노동 수용소의 특징은 주체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자본주의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계속해서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착취의 형태는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생산을 해내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타버릴(번아웃) 때까지 자신을 착취하고 쉽게 자학에 빠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휴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그동안 일 잘하는 법,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법에 대해선 배웠지만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다. 뒤늦게 작은 휴식의 틈이 나를 구원해준다는 것을 깨닫고 나만의 휴식 루틴을 만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했고, 달리기를 시작했고, 명상을 시작했고, 사색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상처를 받아도 자연스럽게 아무는 힘이 생겼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아졌다.
자기혐오와 번아웃으로 무너질 뻔한 나날들 끝에 깨달은 것은, 나는 디자이너이지만 그것은 직업일 뿐이란 것이다. 직업은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나란 사람에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사라져도 괜찮다. 또한 직장에서 잘 해내고 있지 못한다고 해서 최악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해내려는 직장인이고, 가족 구성원에게 따뜻한 사람이고, 친구에게 재밌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더 이상 스스로 학대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하지 말자. 우리 고유의 전문성을 믿자.
참고자료
『나의 일주일과 대화합니다』 (유보라 지음, 휴머니스트, 2021)
『마음도 운동이 필요해』 (왈이의 마음단련장 김지언&노영은 지음, 휴머니스트, 2020)
『무례한 사람들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정문정, 가나출판사, 2018)
『피로사회』(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
라이프컬러링 www.lifecoloring.me
박유진
IT 스타트업에서 브랜드 경험 디자이너로, 사용자가 더 나은 브랜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문제를 찾고 개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휴식, 기록, 생산성에 관심이 많아 관련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uzin.works
책임편집. 이예연
편집.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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