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전진한 목과 펴지지 않는 다리, 저릿한 날개뼈 통증에도 손가락은 살아남아 바삐 움직인다.
하루 세 끼를 먹고 아침엔 일어나고 밤에는 잠을 자는 게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교육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이야. 지난날 낄낄대며 10분 동안 누워서 웹툰을 보던 나에 대한 분노로 겨우 ’디자인을 넘겼다.’라고 한숨 돌리자마자 울리는 수정 메일 알람. 하아. 이 생활을 7년, 심지어 학교에서도 주구장창 야작만 해왔는데 도저히 이 기간을 ‘잘' 보낼 수 없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죽자고 일한다. 잘 일하고 잘 살기 위해, 잘- 먹을 수 있도록 마감 맞춤 식단을 소개한다.
그래도 식사는 합시다 : 마감 기간 건강 메뉴 레시피
앉아서 장시간 일하고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이상 건강한 식사는 필수다. 소개할 메뉴는 건강한 식재료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건강과 시간을 생각한 여러모로 부담 없는 레시피이다 보니 이미 시간 관리를 잘 하는 프리랜서부터 야근이 잦은 인하우스 디자이너까지 고루 추천한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배달 어플리케이션이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보시라.
D-15
계약금이 들어오면 괜히 챠-밍한 디자이너가 된 것 같고 영감을 받으러 유럽이나 동남아로 날아가 야자수 아래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이고, 계약일부터 바로 업무를 시작하면 마감까지 기복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래도 계약을 따기까지 고생한 내게 아침의 여유 정도는 기꺼이 건넨다. 업무를 시작하기 위한 워밍업으로 커피가 아닌 차와 주스로 아침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아침의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해 줄 두 가지 음료를 추천한다.
현실 영국 밀크티,
고소한 밀크티로 여유로운 아침 시간 보내기
영국 기숙사에 숨어 살며 배운 밀크티 레시피이다. 막 현지인 된 것 같다. 뜨끈하니 달콤하게 아기 입맛으로 즐기거나 설탕은 빼고 티백을 진하게 우려서 얼음을 넣고 차갑게 마셔도 좋다. 종종 사치를 부리고 싶을 때면 값비싼 홍차잎으로 향을 강하게 내고 설탕 대신 우유 맛이 나는 천연 꿀을 넣기도 한다.
준비물 : 홍차 티백 1개, 우유, 설탕
- 우유에 홍차 티백을 넣는다.
- 전자렌지에 2분 동안 데운다.
(제품에 따라 다르니 반려 전자렌지의 특성에 맞춘 시간을 찾길 바란다.)
- 전자렌지에 꺼낸 밀크티에 티백을 충분히 우리고 설탕 혹은 꿀을 입맛에 맞춰 넣어준다.
비장한 한국식 동남아 주스,
과일의 에너지로 단련하는 아침
“싱싱한 자몽주스가 먹고 싶다!”
자몽 좀 갖다 댔다고 단숨에 주스 한 컵을 뽑아내는 자동 쥬서기 영상을 보니 그렇게 후련할 수 없었다. 흥분해서 냉큼 모델을 찾아냈지만 이내 쥬서기는 가격으로 날 진정시켰다. 세 번 쓰고 되팔았던 착즙기 덕에 전에 없던 신중함이 생겼달까. 아직 감당할 자신이 없는 쥬서기와 관리하기 힘들었던 착즙기 대신 믹서기를 꺼낸다. 닥치는 대로 갈아버리는 결연함이 왠지 말끔한 착즙 주스만큼 멋스럽게 느껴졌다. 투박하고 꾸밈없지만 어린 시절 집에서 갈아주던 주스만큼은 아침을 과일로 시작하는, 가장 친근한 선택이다.
준비물 : 딸기 혹은 바나나 혹은 파인애플 혹은 전부 다, 우유 (+요거트와 레몬즙)
- 거침없이 다듬은 과일을 준비한다. 어차피 갈릴 거...
- 선호하는 농도에 맞춰 우유나 아몬드 브리즈를 넣고 마구 갈아준다.
- 여기서 요거트와 레몬즙을 조금 넣어보자. 이미 알고 있는 그 맛이 한층 더 고급스러워진다.
- 믹서기로 갈아 만든 되직한 주스는 식사 대용으로도 좋다.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레트로 채소 주스가 있다. 토마토와 물, 시큼한 맛이 싫은 분들은 꿀을 조금 넣어 갈아준다.
*얼려놓은 과일을 넣으면 시원한 스무디가 된다. 마트에 파는 얼린 망고와 블루베리를 미리 사두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동남아의 맛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 D-7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이 활발해지는 시기. 갑자기 추가금 없이 시안을 바꾸려고 시도하거나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수정 요청을 ‘오늘 오후에 받아 볼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로 끝맺는 메일을 일요일 오전에 받기도 한다. 이럴 때면 당을 보충하거나 우적우적 잘근잘근 씹어주거나 쉬지 않고 집어먹을 수 있는 간식이 필요하다. 편의점에서 대충 사 온 과자들로 입가심하다 보면 결국 위장약으로 마무리하고 그 와중에 클라이언트에게 연락이라도 오면 화장실마저 제 때 가기 힘들다. 이렇게 면역력마저 무너지는가. 작년에 착즙기와 함께 구입한 요구르트 발효기가 떠올랐다. 우유가 요거트로 바뀌는 간편하고도 귀찮은 그 기계! 요즘은 요거트를 잔뜩 만들어 곁에 두고 간식거리를 기분에 따라 마구 부숴 넣는다.
요거트 위 토핑 조합 추천
1.
초콜릿과 견과류, 비스킷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초콜렛을 찾는다. 달다는 표현 하나로 부족한 완전 풍미 간식 초콜렛을 요거트와 함께 먹으면 당 충전은 물론, 고소하고 쌉쪼롬해서 입 안이 풍성하다. 쫀득하게 녹은 초콜릿에 부드러운 요거트로 코팅한 견과류로 오늘도 당차게 버티자.
2.
과일과 꿀
뇌에 산소가 돌지 않을 정도로 답답할 때, 요거트에 과일을 마구 썰어 넣는다. 간식답게 취향껏 달콤한 꿀이나 시럽을 올려도 좋다. 요거트와 과일의 비율은 1:1로 한 스푼에 요거트와 과일을 충분히 담을 수 있어야 한다. 클라이언트와 다소 답답한 피드백을 주고받더라도 속만큼은 거북하지 않은 상큼한 조합이다.
3.
고구마와 사과와 바질씨드
아무리 먹어도 허하다. 스트레스가 정신의 허기를 불러온다면 고구마를 소환하자. 요거트와 함께한 고구마는 부드럽게 넘어간다. 사과는 아삭한 식감을 더하고 바질씨드는 빠르게 포만감을 느끼게 해서 스트레스성 폭식을 막는다. 이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면 식사는 과감하게 패스해도 좋다. 식사로도 충분한 간식이다.
~ D-3
‘죄송합니다. 혹시 마감일을 늦ㅊ..’까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감을 늦추고 잠은 자면서 작업을 해야할지, 잠을 포기하고 어떻게든 제 때 납품할지, 아니… 이 정도면 잘…수 있을 것 같기도? 일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이불과 베개는 조심스레 옷장 안에 넣어두었다. 우선 하자…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인간이 나다. 시간은 달력이 아닌 마감일을 중심으로 흐른다. 제 때 먹지는 못해도 뭐든 먹어야 할 때, 드디어 오트밀이 등장한다.
이 날을 위한 비축 식량,
오트밀과 그래놀라
준비물 : 오트밀, 아몬드 브리즈, 그래놀라
- 오트밀, 아몬드 브리즈, 그래놀라는 늘 상부장 두 번째 칸에 구비해둔다.
(상부장은 준비물이 아니다.)
- 오트밀을 아몬드 브리즈로 촉촉하게 적신다. 물론 취향에 따라 분량은 조절 가능.
- 냄비에 끓여도 되지만, 3분동안 전자렌지에 돌려도 뽀얗고 부드러운 오트밀이 완성된다.
- 이제 갖가지 견과류로 만든 그래놀라를 넣는다.
- 밋밋하지만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맛에 익숙해진다. 맛이 강하지 않아 작업하며 식사하기 좋다.
(아직 오트밀이 익숙지않다면 아몬드 브리즈 대신 우유를 넣고 땅콩 스프레드와 바나나를 곁들이기를 추천한다. 든든하고 속이 편안한 식사는 다가오는 마감의 쫄림에서 오는 소화 불량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 D-DAY
거의 다 왔다. 내 집중력도 다 온 것 같은데 뇌와 손가락의 연결이 끊겼는지 키보드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지금은 미식보다 연료가 필요하다. 3일 동안 같은 메뉴를 먹더라도 끼니마다 다른 맛이 나는 스튜를 소개한다. 들어가는 재료는 많지만, 그냥 때려 넣고 끓이면 시간이 완성해주는 메뉴.
잔뜩 만들어놓으면
매일 더 깊어지는 토마토 스튜
준비물 : 토마토 홀, 양파, 버터, 야채 스톡, 감자, 파프리카, 버섯 등 왠지 먹어야 할 것 같은 야채는 모조리 준비한다. (바질과 오레가노, 타임이 있다면 취향껏 넣어준다.)
- 양파를 썰어 버터에 타지 않도록 볶아준다.
- 양파가 익으면 감자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 1차 간을 한다.
- 물을 자작하게 넣어 양파와 감자를 익히듯 끓이고 야채 스톡을 추가한다. (소금 대체 가능)
- 토마토 홀을 갈아 넣고 약불로 끓이며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그리고 남은 야채를 모조리 투하.
- 생각보다 묽은 상태에서 불을 끄고 때마다 약불에 데워먹는다.
- 잔뜩 만들어놓은 스튜는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깊은 맛을 내기 때문에 최종 작업물을 넘길 즈음이면 가장 맛있는 상태의 마지막 스튜 한 그릇을 비울 수 있다.
글쓴이 최지영
디자인스튜디오 ‘로우리트’에서 기획, 공간, 브랜딩 등 경계없는 디자인을 펼치고 있다.
FDSC.txt를 꾸려가는 편집국원으로 활동중이다. @alm.work
책임편집. 김나영
편집. 최지영, 노윤재, 김현중, 이예연, 하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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