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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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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 ARTICLE
주제
멈춤
권고사직을 당했다.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지난 반년간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은 몇 달째 없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을 맞이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느껴지는 삶. 내일을 생각하는 게 괴롭고, 가슴이 답답하고,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한숨을 한 번 내쉬는 순간을 지속하고 있었다.
의욕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여태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또 잘 해내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싫어서 동기부여 영상 같은 것도 여럿 찾아보았다. 화면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그를 통해 얻은 것을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렇게 해보세요!’ 그러나 나에게는 그 소리를 듣는 것마저 지치고, 지겨운 일이었다. 세상이 시끄럽고,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를 둘러싸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열심히 살아라!’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것 같았다.
권고사직을 당하기 하루 전날 밤에는 집 근처 정신병원을 찾아보다가 잠에 들었다.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열심히 사는 건 뭔지,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지, 그게 괜찮은 건지 따위를 고민하면서.
아 이게 유투브에서도, SNS에서도, TV에서도 지겹도록 보고 들었던 번아웃이라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나는 무너지고 있었고, 회사에선 그런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짤렸다.
나는 부모님과 남자친구에게, 그리고 전날 대화를 나눴던 친구에게 나의 사직 사실을 알렸다.
나 짤렸어.
회사에서.
5분 정도 후에 아빠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도 함께 계셨는지, 놀란 두 분의 목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이게 무슨 말이야!’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니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길거리를 걸으면서 엉엉 울며 말했다. 해고당했고, 나는 너무 힘들었다고. ‘나 너무 힘들었어. 너무너무 힘들었어…’ 언제나 괜찮다고,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 또 그렇게 해온 딸이 울면서 힘들었다고 하니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그래도 어서 집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해주시는 부모님이 정말 고마웠다. 전화를 끊으니 바로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원래도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너무 속상해 말고, 어서 가서 쉬라고. 맛있는 거 주문해줄까? 하는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해서 또 고마웠다.
친구도 괜찮냐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순수하게 나의 마음을 걱정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자취방에 도착해 울면서 메뉴를 고르고 있을 즈음에 부모님이 데리러 갈 테니, 같이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 전화하셨다. 잠시 후 엄마와 함께 간단히 짐을 챙기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함께하는 멋진 오후였다. 내 마음은 어두운데, 날씨는 멋지고 창밖의 풍경은 근사해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도착해서 밥을 먹으며 부모님은 너는 아직 어리니, 다른 것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다른 공부를 해보는 건 어때? 라 하셨고, 조금은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고, 나는 언제든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정작 나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규칙적으로 자고, 규칙적으로 먹고,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생활을 하며 지냈다. 답답한 마음과 가라앉는 기분 위에 밝은 얼굴을 덧씌웠다.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어떤 식으로 들여다볼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정말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내 마음을 매일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매우 간절하게 알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고, 알지 못하니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도망쳤다.
그냥 스트레스였던 걸까? 하지만 내 마음은 이렇게 복잡한데. 이게 화가 나는 걸까? 원망스러운 걸까? 그렇다면 나를 자른 회사가 원망스러운 걸까, 속절없이 무너진 내 자신이 원망스러운 걸까. 모르겠다.
내 마음이 뺑소니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권고사직 이후에 여느 날처럼 오전 10시 정도 아침의 노란 햇빛에 눈을 뜨고, 집에 있던 소세지와 빵을 데워 핫도그를 만들어 먹을 참이었다. 소스를 적당히 뿌린 핫도그를 접시에 얹어 TV 앞 짙은 갈색의 소파에 앉았다. 어떤 걸 밥 친구 삼을까 고민하다 우연히 한 영상을 틀었다.
저명하신 정신과 박사님이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난 머리를 비우고 기계적으로 핫도그를 씹으며 내용을 머리에 욱여넣다가 박사님의 한마디에 핫도그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스트레스’로 묶어 한데 치부하기 일쑤다.’

아, 그 말이 내 마음에 박혔다.
내 감정의 이름은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아, 나는 현실에 좌절했다. 나는 시정되지 않는 일들에 분노했고 의심받는 상황이 억울했다. 실망했다. 외로웠고 절망했다. 하지만 난 어디에도 내가 분노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없었다. 절망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억울하고 외롭다고 말해도 돌아오는 건 위로가 아닌 이기적인 감정의 배설이었고 나는 그게 버겁고 두려워 종반에는 입을 닫았다.
아, 그래서 나는 답답했고 더이상 나를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무너졌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실망했었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의심했다. 아, 나는 그래서 지쳤던 거였다. 이게 나의 ‘스트레스’ 였던 거였다. 아, 그랬던 거였구나.
눈물이 빠르게 고였고, 목이 메었다. 핫도그를 마저 씹어 삼켰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다.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실업 급여도 신청하고, 포트폴리오도 정리해보고, 면접도 보았다. 친구들과 식사도 하고, 잠도 푹 잤다. 사소하지만 조금 귀찮은 일들을 찾아서 그 작은 귀찮음, 작은 브레이크를 떨치고 해내려고 노력했다. 내 마음은 멈춰 있어도 몸은 움직이려고 했다.
그리고 난 사직일로부터 한 달하고 2주일을 멈췄고 다른 곳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난 아직 안 괜찮다. 권고사직의 경험이 내게 심어버린 패배감,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의심, 그리고 나의 구조 요청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느꼈던 두려움 같은 무겁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작은 순간마다 나를 괴롭힌다. 내 마음을 쥐어짠다. 손발이 저리고 명치가 조여든다.
나는 여전히 종종 무력함을 느끼기도 하고, 여전히 지쳐 있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아직도 무섭다. 일은 열심히 해도 인생은 어떻게 열심히 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쫓기며 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난 불안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어쨌든 출발해보려고 한다.
권고사직 당했을 때 정말 거지 같았다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날을 향해서.
-마침-
공 N년차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번아웃을 맞고 권고사직을 당했지만 삶은 계속된다. 이 시기에 먹었던 핫도그 맛을 잊지 못해서 최근 재료를 구입해두었다.
책임편집. 김나영
편집. 김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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