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비밀인데, 나도 코딱지 좀 먹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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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에 말수도 적고, 어른 말이라면 고분고분 잘 듣는 참하디참한 아이였다. 그런 나에게 치명적인 비밀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코딱지를 먹는 것. 쬐끄만 콧구멍을 꽉 막고 있는 이 불청객을 시원하게 처리한 후 입속으로 쏙 넣으면 짭조름하게 씹히는 것이 제맛이었다. 아마 내 몸을 충분히 탐색할 능력이 생긴 5살 무렵부터 저학년 어느 때쯤까지는 코딱지 맛 좀 봤으려나.
시간이 흐르고 다섯 살 터울의 둘째 동생이 커서 어쩜 나와 똑같이 코딱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나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그렇게 놀랍고 부끄러울 수 없었다. ‘아니, 세상에! 얘는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코딱지 먹었던 것을 어떻게 알고 따라 하는 거지?’
부모님께서 늘 말씀하셨다. “첫째가 잘해야 동생들도 잘한다. 그러니 언제나 본이 되어야 한다.” 완벽하게 어른들 말씀을 따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유일하게 몰래 했던 행동이 동생으로 인해 들킨 것 같아 괜스레 화를 냈다. “야!! 너!! 드릅게 코딱지 먹지 마!!!”
30년 뒤, 나의 아이도 코를 열심히 후비고 나면 코딱지를 먹는다. 온갖 세균과 먼짓덩어리라고 타일러도 아이는 코딱지를 돌돌 말아 냠냠 먹는다. 그래, 너는 내 자식이 맞구나! 내 자식이 맞다 싶은 순간이 어디 한둘인가.
아이의 외형은 남편 판박이라 날 닮은 구석이 어디 있나 싶다가도 자기가 아끼는 물건에 생긴 자그마한 티끌에 난리법석을 떠는 것을 보면 그래, 내 자식이구나 싶은 것이다. 집에서는 밝고 적극적이지만, 또래 친구들 사이에는 쉽사리 끼지 못하고 빙빙 주위만 도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릴 적 내 모습이다.
요즘은 어린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를 둘러싼 외적, 내적 문제를 맞닥뜨리면 36살의 나를 멈추고, 8살 어린이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내 속에 멈춰 있던 작은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어린이를 만난다.

널 만나러 갈 땐, 축구공을.

이제는 내 아이가 8살이다. 그 어떤 워킹맘도 일을 멈추고  온 신경을 쏟는다는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가 되었다. 12시 하교를 알리는 알람이 지잉- 울리면 모든 업무 올스톱. 가방에 축구공을 넣어 메고, 운동화를 욱여 신고서 후다닥 뛰듯이 아이를 만나러 간다.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엄마를 만나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일단 학교 앞 놀이터로 우당탕탕 뛰어간다. 같은 반 친구들과 놀기 위해 저리도 신나게 뛰어가나 싶지만 아이는 그저 친구들 주위에서 한 발치 떨어져 배회할 뿐이다.
아이와 친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아이가 겪고 있을 마음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고 있다. 아이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아이가 8살이면, 나도 8살이다.
그 시절 나에게 학교는 이제껏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낯설고 커다란 세상이었다.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앉아 눈만 또르르 굴려 가며 같은 반 친구들을 관찰했다.
첫 짝꿍 새벽이는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머리띠를 한 모습이 참 고왔다. 무엇보다 먼저 손들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발표하는 모습이 멋졌다.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처럼 행동하는 원철이는 수업 때면 한글을 몰라 쩔쩔맸다. 아빠가 태권도 관장님이라는 도진이는 작고 다부진 인상에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내 앞자리에는 아침마다 부모님께서 예쁘게 땋아주셨을 가지런한 지네 머리를 한 우진이가 앉아 있었고 나는 그 머리가 참 부러웠다.
나는 같은 반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그리도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 사귀는 방법을 몰랐다. 친구에게 첫마디를 어떻게 건네야 할지, 무슨 이야기로 이어 나가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른 채로 조용히 앉아만 있다 1학년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초등학교 생활은 6년 내내 녹록지 않았다. 또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니 학교에서의 자존감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지지하는 또래 친구가 학교 내에 없으니 학업에서도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없을 수밖에.
8살의 어린이로 돌아간다면, ‘나랑 같이 놀래?’ 하며 말 걸어볼 수 있을까. 지금 저기, 술래잡기하는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어물쩍하며 서 있는 저 아이는 ‘나도 같이 놀자! 끼워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아이에게 고역일 것이다. 그래서 8살 엄마는 축구공을 건넨다. 같은 반 친구들이 술래잡기를 멈추고 우르르 몰려들어 ‘이거 준호 공이에요? 우와- 준호야 같이 축구하자!’ 외치니 못 이기는 척 ‘응! 이거 내 공이야! 같이하지 뭐.’라고 이야기하는 아이의 눈썹이 들썩인다.

200원짜리 회오리바

심리상담센터에서 양육자 상담을 했을 때의 일이다.
“기억나는 생애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4살 어느 봄날이었던 것 같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볕은 따뜻했고, 볕을 등지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내 손에 500원짜리 동전 한 닢을 손에 쥐여주었다. 다리 건너에 있는 동네 슈퍼에서 생애 첫 심부름을 하기 위해 결연한 걸음걸이로 집을 나섰다.
엄마는 내게 심부름 거리를 사고, 먹고 싶은 것을 사 오라고 했다. 까치발을 들고서 낑낑거리며 슈퍼 입구에 놓인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스크류바, 죠스바, 메가톤바를 지나쳐 눈에 들어온 것은 200원짜리 회오리바.
엄마의 심부름 거리와 내 회오리바를 양손에 들고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다리를 건너 북적이는 시장통을 지나 집에 도착하기까지. 긴 여정이었다. 엄마에게 심부름 완수를 보고하고 ‘엄마 이거 까주세요.’ 한 뒤  받아 든 회오리바의 보들보들하고 폭신한 맛이 생애 첫 기억이다.
“그러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들려주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대학 시절, 집안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휴학을 해야 했고, 복학을 위해 일을 하는데 몇 달간은 일터로 오가는 차비와 점심 비용을 제외한 모든 돈을 저금했다. 복학 등록 기간까지 목표한 금액을 모아 등록금을 내고, 부모님 도움 없이 자취할 수 있는 집을 구했다.
복학 후에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 나갔다. 어렵사리 번 돈으로 공부하는 것이지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학교 다니는 것을 즐겁게 여기니 좋은 성적으로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익히고, 부모로부터 경제적, 심리적인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상담가는 말했다.
“어머님의 기억은 어떠한 성취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네요. 어린 시절 심부름을 해낸 성취감, 학창 시절 부모의 도움 없이 어떤 것들을 이뤄낸 성취감. 아마 지금까지 어머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취’와 ‘인정’에 대한 것일 거예요. 4살은 어린이보다 아기에 가까워요. 그런 아이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통을 지나고 차가 오가는 위험한 다리도 건너서 심부름을 했단 말이죠. 스스로도 너무 기특하잖아요. 그때의 기억을 아주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그렇다. 어찌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어내고 얻어낸 성취감들이 내게 내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최초의 성취에 대한 경험 후 똑같은 어려움을 겪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양 의연한 마음으로 맞설 수 있을 때 우리는 제 자신의 유능감을 믿게 된다.
알프레트 아들러는 ‘안정감은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의 느낌과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나의 부모님은 따뜻하게 안아주는 일은 없었지만,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상의 과제를 던지며 기다려주고,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결핍을 통해 스스로 내적 안정감을 찾는 방법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부모인가. 아이를 향해 꼬옥 안아주며 사랑한다 말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놀이터에 아이 혼자 실컷 놀도록 놔두는 법이 없다. 아이의 요구보다 아이를 향한 나의 반응이 더 빠르기에 아이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쌓여 지금의 어른이 된다. 아이가 성취감과 내적 안정감을 가지고 너른 세상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이제는 내가 기다려줄 차례다.

너도 나도 다른 시계를 가졌는지도 몰라.

얼마 전, 아이의 같은 반 친구와 동네 놀이터에서 지나가던 동네 어린이들을 모아 공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골키퍼를 하기로 한 아이는 왜인지 갑자기 공놀이 구역을 벗어나 뾰로통한 채로 그네를 타고 있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놀이 흐름이 끊기니 짜증도 났고, 어리둥절해하였다.
나는 쩔쩔매며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함께하는 친구들이 당황스럽고 기분 나빠하기 때문에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무엇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행동의 당위성만을 이야기했다. 전체를 위한 개인으로서 어린이의 자세만을 강조했을 뿐, 아이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때, 같은 반 친구 어머님이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준호야, 공놀이가 하기 싫은가 보구나. 준호야 그네에 앉아 무슨 생각해?’
‘.......’
‘공놀이가 싫을 수도 있어. 친구들이 모두 한다고 해서 네가 싫은데 꼭 할 필요는 없어.’
‘.......’
‘아줌마는 준호 네 마음이 궁금해. 혹시 준호가 친구들과 하고 싶은 놀이가 있어?’
‘.......’
‘네가 말하기 힘들면 아줌마가 친구들한테 대신 말해줄 수도 있어. 아줌마한테만 살짝 이야기해줘~’
‘술래잡기요…’
‘아~ 준호는 술래잡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 그것도 재미있겠다. 그런데 지금은 공놀이하고 있던 중이어서 친구들이 기다리니까, 공놀이 끝나고 술래잡기할 수 있도록 준호가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어때?’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기 위치로 뛰어 들어갔다. 무엇이 아이를 움직였을까. 그 어머님의 말 속에는 어린이 개인에 대한 존중도 있었고, 다수의 친구에 대한 배려 또한 느껴졌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아이의 수업 중 주의력 집중에 대한 어려움으로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오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잊힌 기억 속 같은 반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같은 반 지성이도 선생님께 지적받는 일이 많았다. 수업 중에 질문이 많았고, 그 때문에 선생님께서 판서한 내용도 늦게 받아 적었다. 모르는 것도 많았는지 짝꿍에게 물어보는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수업 방해로 오해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지성이 같은 어린이는 꾸지람도 많이 들었고, 어떤 날은 칠판 앞에서 엉덩이를 맞으며 선생님으로 하여금 말 안 듣는 학생의 본보기가 되었다. 어린이의 전인교육을 강조하는 학교라는 곳은 전체를 위한 개인으로서 어린이가 존재할 뿐, 어린이 개인의 성취와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어릴 적 지성이나 우리 집 아이와 같은 어린이는 다른 아이들과 세상을 배워가는 시간이 다르게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평범한 어린이였던 나 또한 친구들보다 느린 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기에 어른들에게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어린이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분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어른인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나 또한 회사나 단체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성취나 바람이 무시되었을 때의 어떤 상실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주변과 학교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아직 10년도 채 세상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동물 길들이듯 어린이의 방만함을 길들이고, 고집을 꺾고, 통제하면서 전체를 위한 개인은 희생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칠 것인가. 공교육과 현행 교육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등의 거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어른인 우리가 주변 어린이들이 기억하게 될 ‘최초의 기억’ 속에서 어떤 긍정의 경험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훗날 어른이 될 어린이에게 따뜻한 나비효과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난 기억이 모두 안온한 것은 아니었기에 어린 시절을 복기하는 것이 괴로운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어린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닫아두었던 내 작은 세상의 문을 열어 언제고 손잡아 함께 나아갈 것이다.
김나영 콘텐츠를 기반한 전시 공간 기획, 책, 인쇄 매체를 디자인하는 만능 디자이너다. 하루를 촘촘히 움직이며, 디자이너의 작업 환경과 돌봄 환경을 오가고 있다. 아이뿐 아니라 나에 대한 정신 돌봄을 위해 생각 비우기를 실천 중이다. @__________n.kim @n.kim.maison
책임편집. 김해인
편집. 이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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