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김세린, 권수진
사진 제공: 김을지로
서론
[페디소 인사이드]는 디자이너 눈에만 보이지만, 알고 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이번 [페디소 인사이드]의 주제는 ‘생산자로서의 디자이너’로, 자신에서 출발한 무언가를 직접 생산하길 욕망하고 실행하는 생산자로서의 디자이너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페디소 인사이드' 네 번째 주인공은 3D 아티스트 김을지로 님입니다. 김을지로 님은 작가와 디자이너의 포지션을 오가며 3D 그래픽 위주의 작업을 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산 사람 빼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자칭 타칭 3D 연금술사, 김을지로 디자이너와 함께 최근에 참여한 〈Quarantine Etudes〉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더불어 3D로 자신의 욕망과 흥미를 시각화하는 ‘생산자’로서의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PART 1. 〈Quarantine Etudes〉 (2020)
Q. 〈Quarantine Etudes〉 작업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Quaratine Etudes〉는 음악가이자 기획자 영 다이(yeong die)님이 저와 개발자 한 분에게 함께 작업 하자고 제안해주셔서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입니다. 전례 없는 이 코로나 시대에 ‘자가격리'와 음악가들이 가지는 ‘연습'이라는 훈련의 기간이 닮아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해 가상에 펼쳐지는 공간 속에서 5명의 뮤지션은 각자의 연습곡을 공개합니다. 이 가상의 텅 빈 공연장에서 관람객은 마음껏 뛰거나 소리를 내며 돌아다닐 수 있고, 음악가 5명의 연습곡을 감상할 수 있어요.
원래 이 프로젝트는 서울특별시와 서울문화재단의 공간에 대한 지원사업 아이디어였어요.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서 공간을 가상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그 가상공간을 설계하는 일을 제가 맡게 된 거에요. 가상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자는 것에서 출발했어요. 전반적인 기획은 영 다이 님이 하셨고, 가상의 개념을 얼마나 가져와야 적당한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했어요. 본 프로젝트는 11월 한 달간 정해진 두시간씩만 오픈되었는데, 무궁하고 정적인 가상의 속성을 현실의 선형적 시간에 선택적으로 데려다 놓는 방식을 통해 관람객의 경험에 침투하기를 꾀했습니다. 이런 지점들이 가상공간의 특징과 현실이 맞닿을 때 생기는 글리치에 대한 고민을 통해 계획할 수 있었던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글리치(Glitch): 시스템이 본래 의도된 값이 아닌 다른값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일시적인 오류.
Q. 이 프로젝트의 대략적인 전체 과정이 궁금합니다. 기획부터 제작, 실제 공연 오픈까지 총 얼마의 기간이 소요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나요?
전체 프로젝트의 기간은 2020년 5월부터 11월까지예요. 그 기간 동안 이 작업은 저에게 거의 체화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처음에는 회의를 통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서 진행했어요. 3D 작업을 진행한 기간은 6월부터 9월 말까지예요. 다시 돌아보니까 꽤 오래 진행한 프로젝트더라고요.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워크플로우가 없던 형태의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었고, 저희 중에 실제로 이런 작업을 해본 전문가도 한 명도 없었어요. 저는 3D를 하던 사람이고, 개발자분은 개발만 하시던 분이고, 영 다이님은 음악을 하시는 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 가지 채널로 동시에 진행해 나갔어요. 저는 공간 구성과 색감 등 시각적인 요소를 발전시키다가, 게임개발로 이어질 때 기술적으로 문제가 될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체크하면서 진행하고, 개발하시는 분은 이에 따른 피드백과 더불어 유저 사용성에 관한 인사이트를, 영 다이님은 시각과 청각 중 어디에 얼만큼 균형을 둘지 등 전체적인 구색을 조율해 주시는 역할을 담당하셨어요. 전체 프로젝트 기간은 길지만, 각각의 작업이 닿는 부분은 간헐적이어서 체감상 작업 기간이 엄청나게 길었던 느낌은 아니었어요. 커다란 맥락 아래서 각자 작업하다가 종종모였다 흩어지는 느낌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두 달엔 베타테스트와 대망의 오픈을 위해 열심히 소통했죠.
Q. 유례없는 팬데믹 시대에 격리의 시간과 홀로 감내하는 음악가의 연습 시간이 닮아있다는 점에 기인하여, 가상의 공간에서 텅 빈 공연장을 만들고 거기서 특정 시간대에 음악가들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는 기획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설산의 로딩 이미지를 지나 공연장이 펼쳐지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이런 비주얼 콘셉트를 어떻게 설정하셨는지 궁금해요.
전체적인 공간에 대한 구상은 영 다이 님이 하셨고, 구체적인 부분들을 함께 의논하면서 발전시켰어요. 사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같은 클래식한 공연장에 타 장르의 음악가가 입성하기는 굉장히 힘들잖아요. '현실에서 가기 어려운 곳'을 큰 주제로 구체화했습니다. 나아가 이 공연장이 펼쳐지는 곳이 가상공간이다 보니까 기존의 공연장의 모습을 화려하게 구현할지, 서슴없이 파괴할지 등의 정도의 무게에 관한 고민도 많이 주고받았습니다. 거기서 파생되어 로딩 이미지가 설산이 되었어요. 웅장하고 가기 쉽지 않은 곳.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갈 수는 없는 곳. 그렇기 때문에 진짜 있을 것만 같은 곳. 이 시기에 영 다이 님의 뮤직비디오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덕분에 기획자인 영 다이 님과 많은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고, 미감이 거의 동기화된 상태였어요(웃음). 같이 영화 〈샤이닝〉의 분위기를 이야기하다가 설산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영화 속에 아이가 자전거 타고 다니는 카펫 같은 것 좋겠다는 이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콘셉트를 구체화해 나갔죠.
영화 <샤이닝>의 한 장면.
쿼런틴 에튀트 내부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스크린샷 & 설산 로딩 이미지
Q. 상상 속의 공간을 3D로 구현하면서 겪은 어려움이나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3D 작업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공간을 제시하는 것과 3D를 작업하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개념이 다르거든요. 사실 어떤 공간을 말할 때 완전히 객체화된 공간이 없잖아요. 공연장이란 말 안에 그 공간이 가지는 큰 분위기를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요. 그런 미세한 간극을 조율해나가는 것이 기억이 납니다.
3D 작업으로 단순히 공연장을 재현했을 때 저절로 웅장함이 생기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조명도 실제 공연장처럼 구현해야 하고, 빛도 시간대별로 달라서 낮으로 할지, 밤으로 할지 고민했어요. 실내 공간에서의 빛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은 또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지도 생각했고요. 그런 부분들을 만들어가면서 계속 조율했던 것 같아요. 외부의 빛으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할지, 아니면 그냥 시간대를 밤으로 설정하고 하고 실내에 있는 인공조명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을 만들지와 같은 요소를 정해가는 것이 재밌었어요. 최종적으로는 공연장 안에 엄청나게 큰 창문을 뚫었어요. 근데 아마 관람객들은 잘 못 느꼈을 수도 있어요. 밖을 밤으로 설정했거든요.
내부 실내등의 조도 같은 것들도 미세하게 조율했는데, ‘유니티’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했어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유니티’를 처음 사용했는데 저도 튜토리얼로 간단하게 공부하고, 개발자님도 함께 공부해서 작업했어요. 그래서 이 조명을 ‘유니티’로 옮겨서 작업하는 것이 일종의 도전이었어요.
공연장을 만들기도 쉽지 않았어요. 제가 3D 작업을 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3D 작업자도 각자의 특징이 있거든요. 유기체를 중점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건축물을 주로 하는 작업하는 사람이 있고, 교통수단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식으로요. 사실 저는 인물을 위주로 작업을 해와서 공간 작업 자체는 처음이었어요. 처음에 생각한 대로 공간을 만들었더니 수직적인 느낌이 강하고 기대했던 웅장한 분위기가 안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몇 번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영 다이님이 콕 집어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정도의 규모면 좋겠다고 하셔서 실제 콘서트홀 도면의 탑뷰를 참고해서 공간을 연출했어요. 실제 도면을 보니까 공연장이 광각의 형태로 생겼더라고요. 그걸 참고해서 작업했더니 공간감이 훨씬 크게 드러났어요. 이러한 과정 덕분에 건축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높아졌어요. 가상공간을 설계하는 데 실제 도면을 참고해서 실제 건축물에 대한 이해도를 발전시킨 경험이 낯설면서도 재밌었어요.
쿼런틴 에튀트 내부 조명, 빛과 관련된 스크린샷 & 공연장 내부의 창문 스크린샷
참고했던 건축 도면 레퍼런스 같은 이미지 자료
맨 처음에는 마구 구기고 다시 살리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정리가 안 된 러프 스케치 같은 3D 모델을 만들어서 작업하다가 확신이 들고 나서 다시 도면부터 정리해서 만들게 되었어요. 전체적으로 이 작업은 처음부터 딱 정해놓고 만들어나갔다기보다 계속 주물럭주물럭하면서 완성했어요. 작업 기간이 길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Q. 공연장의 조명과 객석, 커튼과 천장의 무늬 등 세밀하게 관찰하고 구현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공연장의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공연장 인테리어는 샹들리에를 제외하고는 다 직접 만들었어요. 카펫의 무늬라든지, 무대의 금속 장식 같은 것들도 기존의 크고 클래식한 공연장들의 문법을 참고해서 작업했어요.
공연장의 커튼, 카펫의 무늬 등 스크린샷
인테리어 요소 중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금속 장식물의 디테일을 정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미세하게 조금만 달라져도 확 미니어처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사실 3D로 실사 이미지를 구현할 때 중요한 것이 먼지의 크기 같은 것이에요. 먼지가 너무 작아서 안 보여도 없는 것 같고, 너무 크면 전체가 다 미니어처 같아지거든요. 3D 작업은 이렇게 미세한 차이로 느낌이 크게 달라져요. 그래서 이 금속 장식물의 디테일을 다듬는 것이 중요했고, 어려웠어요. 이 부분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서 공간에 입혀보고 또 수정하고, 다시 가져가서 수정하고 이런 식으로 미세하게 작업했어요. 비슷한 맥락에서 공연장 바닥의 패턴의 조밀도 같은 디테일한 부분들이 모여 전체 공간 규모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작은 부분도 신경 쓰면서 작업했습니다.
무대 금속 장식물의 디테일에 대한 스크린샷
Q. 이 공연장에서 5명의 음악가는 각자의 연습곡을 선보입니다. 이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이 특이해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천정에서 핀 조명처럼 떨어지는 빛 아래에 서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식이었어요. 이런 흥미로운 연출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빛으로 정해놓았던 것은 아니었어요. 음악 재생의 트리거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처음에는 악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져오려고 하니 각각 음악가에게 특정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감상에 방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상에 누가 될 수 있는 섬세한 부분을 영 다이님이 잘 조율해주셨죠. 그래서 좀 더 간접적인 트리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십계명 같은 비석을 세울까, 동그란 결계 안으로 들어가면 음악이 재생되게 할까 이런 추상적인 구상을 하다가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공연장에 있을 법한 시각적인 요소를 고민하던 차에 떠올랐던 것이 '스포트라이트'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렇게 구현하게 되었어요. 추상적이고 조금은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어요.
본래는 불교 용어로 일정한 구역을 정해 행동에 제약을 두는 행위를 뜻하나, 판타지 장르나 게임 속에서 일종의 투명한 막을 기준으로 무엇인가 발현시키거나 무엇으로부터 방어하는 경계를 의미한다.
스포트라이트 부분의 스크린샷
Q. 이 가상의 공연장에서 관람객은 마음껏 뛰어도 되고, 소리를 내도 됩니다. 관람자는 자유롭게 공연장을 돌아다닐 수 있고요.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작업하면서 이런 특성(관객이 능동적으로 관람하는 환경)을 고려해 특별히 설계된 부분이나 신경 쓴 점이 있다면요?
사용자가 의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만들지 말지 이런 부분도 고민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관람객이 가상의 공간에서 마음껏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 움직임의 자유를 허락할지에 대한 부분을 고민했죠. 의자 앞뒤로도 막 점프할 수 있게 할까 말까 이야기 나누다가 영 다이 님이 그 정도의 에티켓은 지킬 수 있게 하자 해서 그것까지는 구현하지 않았어요. (웃음) 정해진 것이 없이 자유롭게 다 해볼 수 있는 공간이어서 어렵고 재밌었던 것 같아요.
Q. 이 공연장에서 개인적으로 소개하고 싶은 부분(공간)이 있나요?
〈Quaratine Etudes〉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이 공간을 관람하던 친구 한 명이 어느 지점에서 점프하면 끝도 없이 계속 떨어질 수 있는 구멍 같은 것을 발견한 거예요. 벽 쪽으로 계속 점프하다 보면 올라가 지다가 갑자기 밖으로 올라가 지다가 더는 디딜 곳이 없어지면 3D 공연장 밖으로 떨어져요. 무한의 심연으로 가는 것처럼 계속 내려갑니다. 점점 멀어질수록 공연장의 소리도 희미해지고요. 사실은 의도치 않은 프로그램상의 오류 같은 것인데, 저는 이게 너무 좋았어요. 그런 오류의 공간을 발견할 정도로 관람자들이 적극적으로 그 공간에서 돌아다녔다는 것도 감동적이었고요.
의도치 않게 발생한 오류의 공간
PART 2. 자신에서 출발한 무언가를 직접 생산하길 욕망하고 실행하는 ‘생산자로서의 디자이너'
Q. 앞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3D 작업은 미세한 부분을 조율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 것 같아요. 미세하게 달라져도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지기도 하고요. ‘가짜' 같아진달까요?
맞아요. 그런데 또 너무 ‘진짜’ 같으면 작업자로서는 표현에 있어 효율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사실과 가깝게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어느 지점 이상 도달하면, 사진으로 찰칵 찍어낸 3D 스캔 데이터처럼 보일까 싶어서요. 재현과 변형 사이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 작업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사이에서의 균형을 최근에 조금씩 알아가는 중입니다. 예전에는 묘사와 재현에 목메는 자신을 부정하곤 했는데 현재로서는 저는 어쩔 수 없이 실사 표현에 끌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어요. (웃음) ‘진짜' 같은 느낌을 추구하되, 요소 자체를 이질적으로 조합하고 기존의 기능을 도치시켜요. 저는 이런 지점이 재밌는 것 같아요. 이것이 3D 작업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Q. 말씀을 들으니 개인 작업 〈Landscape〉에서 언덕에 심어진 팔이 움직이는 모습이나 〈Quarantine Etudes〉 공연장 속에서 흐르는 시간 속에서 피아노가 부서진 채 멈춰있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이런 독특한 발상의 아이디어는 보통 어디서 얻으시나요?
그냥 문득 떠오른 것을 메모장에 적어놓기도 하고요. 사실 작업을 하는 중에 떠오르는 것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왜냐면 의도치 않은 결괏값이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작업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어요. 3D 작업은 옳고 그름과 같은 관성에 끌리기 쉬워요. 이상적인 완성도라는 블랙홀에 편중되기 쉬운 영역이랄까요. 이런 부분을 경계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이상한 게 나왔을 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기. 그래야만 3D 작업을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기도 해요. 물론 〈Quarantine Etude〉는 이런 예시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평상시 작업할 때는 이런 부분을 유념하는 편입니다. 이상하게 나와야 다시는 (누구도)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잖아요. (웃음) 돌이킬 수 없는 장면을 붙잡는다는 점에서 3D는 약간 회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도 한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최근에는 식물을 보면서 여러 발상을 떠올려요.
Q. 다시는, 누구도 못 하는 이상한 작업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하신 작업 중에 가장 이상하게(웃음) 한 작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비정형 3D 조형 연구 모임인 R&D(@retry.n.destroy)에서 결과발표 했던 〈Type〉 시리즈 작업을 좋아해요. 이 작업은 생물의 종-속-과-문-강-문-계를 어떻게 분리하는 것일까 하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어요. 식물의 개념을 알고 싶어서 다양한 이미지를 리서치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특징들이 동물과 식물을 구분 짓는 것인지도 궁금했고요. 어떤 동물은 식물 같고, 어떤 식물은 동물 같기도 하잖아요. 그것을 구분하는 시각적/유전적 특징은 뭐냐는 궁금증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생물이라는 것의 특징은 ‘번식’과 ‘외부로부터의 양분 흡수’라는 점에서 착안해 캡슐(알)의 형태의 유기체를 만들기도 하고(Type-Capsule), 수동적·능동적으로 양분을 흡수하는 유기체를 만들기도 했어요. (Type-A, Type-B) 이 작업은 직관과 충동으로 시작했던 이전 작업들보다 개인적 흥미에서 출발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것을 베이스로 작업을 한 것이어서 더 애착이 가요.
이 작업이 더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모든 것을 제가 다 통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저는 어떤 부분들은 제가 수치를 부여한 뒤에 알아서 흘러가게 두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설계를 해둔 후 바람이 불게 하는 식으로, 어떤 설정을 해두고 거기에 따라 예상치 못한 결괏값이 나오는 방식인 거죠. 다시 똑같이 만들 수 없는 것이에요. 어느 정도의 표현은 컴퓨터에 몫을 부여하는 거예요. 이것 역시 3D 작업만의 매력인 것 같아요.
Q. 을지로 님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까지는 3D 작업이 모든 결괏값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작업인 줄만 알았어요. 어느 부분은 컴퓨터와 협업한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을지로 님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과 조소를 전공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3D 작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3D는 졸업 후에 하기 시작했어요. 학교에 다닐 때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로 쓸만한 작업을 하지 않았었어요. 실험적인 애니메이션 영상을 만든다든가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더 하고 싶은 것은 뭘까 고민을 하다가 외국에서 예술 분야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에 가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3D를 배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평소에 잘 만든 영상 오프닝 시퀀스를 좋아하기도 했거든요. 처음엔 흥미가 있으면서도 돈이 되는 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합의점으로써의 3D를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3D를 처음 시작할 때는 관심사가 영화 쪽으로 치중되어 있었는데, 그 분야는 스페셜리스트가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모델링에 특화되어 있다던가, 라이팅 작업만 주로 한다던가 이런 식으로요. 근데 저는 다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인 작업을 좀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Q. 3D 작업은 규모와 범위가 꽤 커 보여요.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합니다.
3D 작업을 처음 할 때는 트렌드를 따라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 같아요. 메탈릭하거나 영롱하고 뽀얀 이미지들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 같아서요. 때때로 그런 작업만 유독 잘 되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나도 저렇게 작업해야 하나’ 이런 쓸데없는 고민도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작업을 내가 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지 않아요. ‘그건 내가 할 작업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것을 하자’ 이렇게 생각해요. 사실 저는 기하학적인 것보다 곡선적인 것들에 대한 작업을 해왔고, 공간이나 오브제보다는 시각적으로 자극이 되는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인 거 같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은 생명체처럼 보이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식물에 대한 작업도 계속하고 싶어요. 지금 거의 식물에 꽂혀서 돌아버린 상태에요. (웃음)
을지로 님의 반려식물
Q. 식물에 꽂혀계신다고 하셨는데, 식물에 대한 흥미는 어떻게 시작되셨나요?
키우는 식물이 없었을 때부터 아파트 1층 화단 식물을 관찰하기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독립을 한 이후 한 식물 친구를 데려왔는데 너무 좋았던 거죠. 제가 데려오는 친구들은 특징이 뚜렷한 식물이 많은데 형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 같아요. 형태를 보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한 원인을 찾는달까요. 저는 어떤 형태의 원인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 이유를 계속 찾는 것 같아요. 학부 시절 때 졸업작품으로 했던 작업도 왜 ‘동물'은 ‘동물’ 같아 보일까 하는 의문에서 만들었던 2D 모션그래픽이었어요. ‘동물'은 근육이 단위별로 나뉘잖아요. 근섬유 아래 근육 다발이 있고, 또 그 안에 미세한 것들이 있는 식으로요. 그런 계층적인 움직임에서 착안을 해서 만들었어요. 이야기하다 깨달았는데, 저는 점층적이고 계층적인 것이 모여서 하나가 되고, 움직이는 유기체들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 원인을 탐구하시고, 정보를 습득한 뒤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과정이 제겐 생산자로서의 원동력인 것 같네요.
졸업 작품 이미지
Q. 조금 늦은 질문이지만, 을지로라는 활동명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제가 을지로라는 이름을 쓴 것은 제가 학생 때 시각이랑 조소를 함께 공부해서 조소과 수업의 실기 재료를 사러 을지로에 처음 왔었어요. 그때 본 을지로 4가의 풍경이 정말 작은 단위의 요소들, 화학물질이 집약적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게 너무 멋있는 거예요. 뭐든지 다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런 곳이 다 있네 감탄하면서 필요한 재료를 다 사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지하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을지로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에 시선이 갔어요. 제 이름이 은진이거든요. 영문 알파벳이 을지로랑 겹치는 부분도 있고, 이 공간도 좋고 해서 사용하게 되었어요.
Q. 앞서 언급하셨던 비정형 3D 조형 연구 모임인 R&D(Retry&Destroy)는 어떤 것인가요? 이 모임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작년 이맘때쯤에 일할 때의 포지션과 취해야 하는 태도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자급자족하기 위해 3D를 배웠던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제 작업을 하기 위해서가 더 컸기에 상대적으로 즉각적인 보상을 취할 수 있는 실물 재현과 외주작업의 관성을 경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명 어딘가에 미술과 기술과 사이에서 3D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었고요. 그래서 3D 조형 연구 모임에 구성원을 모집하는 SNS에 글을 올렸죠. 생각보다 멋있는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그때 FDSC의 회원이시기도 한 최수빈 님과 양지은 님도 알게 되었고, 다른 좋은 동료분들도 알게 되었죠. 혼자서 웅얼거렸으면 다음 단계로 발전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구성원분들과 마음껏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한바탕 각자 작업하면서 느꼈던 고민을 환기시키고 나니 다음 단계의 이야기로도 갈 수 있었고요.
R&D 모임의 활동 사진
Q. 정말 생산적이고 좋은 모임이네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혼자 생각하고 혼자만 이야기하면 매몰되기도 하는 것 같고요. 이 모임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는 건가요?
이 모임은 지금 2기까지 진행되었어요. 너무 좋았는데, 너무 좋으니까 더 좋을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사람을 뽑으면 무슨 기준으로 뽑아야 할지도 어렵고, 지금까지는 모임 공간을 지은님이 빌려주셨는데, 앞으로 모임에서는 공간의 문제도 있고요. 처음에는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공유했는데, 단편적으로 숙제를 하는 느낌이 조금 있었어요. 그래서 두 번째 모임을 할 때는 토론이나 담론 위주로 진행했는데 두 방식 모두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어요. 물론 그래서 좋았지만요. 처음은 작업하면서 외롭거나 할 때 함께 대화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진행 할 수 있었는데, 모임이라는 것을 운영하는 데는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운영과 설계에 대한 마음가짐이 부족했던지라 다음에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선 같이 운영해 나갈 동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여력의 부족으로 지금은 잠시 휴식하는 상태에요. 목적이 분명해지고 단단해지면 다시 시작할 것 같아요.
Q. 더 멋진 모습으로 R&D 모임이 돌아오길 기대할게요.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으신가요?
사진을 다루는는 분과 작업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한번 불발돼서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로 남아있어요. 저는 디스플레이 안에서 구현할 수 있는 시각적인 요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저와는 반대로 실사의 이미지를 다루는 분과 작업을 하면서 초월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자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재밌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계가 없는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분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사람을 찍었는데, 제가 그걸 3D로 다시 만들고 그 위에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덧입힌다든가. 사람이 아니어도 되겠죠. 흥미로운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밌는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Q. 멋진 작업이 될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을지로 님을 맘껏 홍보하셔도 좋고요!
3D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편하게 질문을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막연하게 3D는 어렵다고 생각하시는데, 인터페이스만 적응하면 생각보다 할 만한 영역이기도 하거든요. 영화와 게임 속의 화려하고 밀도 높은 3D 그래픽을 주로 마주하다 보니 3D 작업이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루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넓은 영역 중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부분만큼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렵지 않아요. 3D 하세요. (웃음)
그리고 하나는 제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내용인데요. 요즘 신발 브랜드의 비주얼 디렉터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운 좋게도 제 개인 작업의 느낌을 좋아하시는 대표님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데, 마치 어느 소설의 세계관을 구축하듯이 차곡차곡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기획을 다져나가고 있어요. 하드웨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 3D 그래픽작업의 특성도 배려해주셔서 고사양 컴퓨터를 사용할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2번, 자유롭게 출퇴근하고 있어요. 제가 개인 작업으로 해왔던 것들은 보통 개인적인 궁금증에 대한 탐구의 맥락이었는데, 이번에 시각적인 요소를 브랜드에 도움이 되도록 감독하고 기획해야 하는 책임이 생기니까 오히려 제 작업의 논리 구축에도 도움이 되기도 하고 브랜딩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어서 좋네요. 디자인을 더 신경 쓰고, 디자인에 대한 것들로 회귀하는 것 같아요. 즐겁게 작업하고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올해 안으로 꼭 개인전을 하고 싶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요. 꼭 개인전을 열 테니 많이 보러오세요! 공간 대관 같은 제안도 환영합니다. (웃음)
김을지로 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uljiro/
글쓴이 김세린
그래픽 디자이너.
아직은 여러모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오래오래 해먹는 건강하고 멋진 할머니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선 끈끈한 연대가 필수라고 생각하며 FDSC를 통해 적극 연대하고자 한다. 많은 동료들과 함께 멋진 할머니 디자이너가 되는 그날까지!
@serin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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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편집. 이예연
편집. 김나영, 김현중, 노윤재, 하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