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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디자이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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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졸업할 당시 나는 상당히 자신감이 넘치는 디자이너였다. 나만의 디자인 스타일과 철학이 있었고 기발한 아이디어도 낼 줄 알았다. 또한 디자이너는 가장 들리지 않는 곳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올리는 직업이라는 두루뭉술하지만 나름의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많은 디자인 분야 중 어느 분야에서 일하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2년 동안 1년 주기로 광고 회사와 미디어아트 회사에 다녔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주가 되는 광고 회사는 잘 만드는 것보다 빨리 만드는 것이 중요한 회사였고, 사람들과 교류와 공감을 하는 미디어아트 회사는 기획자나 제작자가 아닌 이상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없었다. 각각의 회사에서 내 개인의 성장은 하지 못했다고 판단해서 그만두었고, 세 번째 회사는 정말 신중하게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건을 걸었다. 내가 배울 수 있는 윗사람이 있고, 디자이너가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하며, 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여야 한다. 나의 역량을 잘 활용하여 실력 있는 디자이너이길 원했고,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하길 원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에 입성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딪힌 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는 정말 매웠다. 적은 인원이 일하다 보니 디자이너 한 명이 기획, 마케팅, 출판 그리고 디자인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한정적인 일만 했던 2년 차 짹짹이었다(짹!). 디자이너로서 포용해야 하는 업무의 범위가 넓어지니, 새로이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디자인에만 치중됐던 나의 작업 방식은 이곳의 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업무는 밀려드는데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도 안 잡혔다. 나를 바라보는 상사는 깊은 한숨만 늘어났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건가? 내가 그동안 해온 건 틀린 방식인가?’에서 시작된 혼란은 ‘사실 디자이너가 내 길이 아닌 게 아닐까?’ 같은 고민까지 이어졌다. 디자이너로서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상황에 도움이 안 되는 지난 2년의 경력에 후회가 밀려왔다. 아찔했다. 다시 대학교에 가고 싶었고, 내 앞에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었다. 갈피도 못 잡으면서 불안감에 마구잡이로 뭐든 시작했다. 각종 스터디를 하고, 책도 잡히는 대로 읽어보고 여러 브랜드도 공부했다. 어느 순간 배우는 것은 의무감으로 다가왔고, 일의 연장선 같았다. 회사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계속 보게 되고, 자신감이 없으니 계속 움츠러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내 마음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디자인은 그만두고 학문 쪽으로 넘어갈까? 대학원을 가서 미디어아티스트로 전향해볼까? 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즈음 디자인에 대한 열정도, 자신감도 거의 0에 수렴했다.
목표를 잃어버렸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당장 내일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할지도 몰랐다. 한 달 뒤에도, 일 년 뒤에도, 십 년 뒤에도 계속해서 방황하는 내 모습만 보였다. 방황하는 내 모습에 나 자신도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었다. ‘가르쳐줘도 못 하다니, 나는 바보인가? 나는 안되나 보다. 디자인에 재능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흉내만 내는 거였나보다. 아마 다른 일을 해도 마찬가지겠지’ 매일 속으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디자인 외길만 바라보고 달려와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겨우 생각난 게 ‘아르바이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였다. 디자인을 그만두지도, 그렇다고 열정을 가지고 해낼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회사를 잘 다니는지 궁금했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니 인간관계도 꼬이는 것만 같았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다 나에게 달려오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내 삶에서 마음에 드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에 끌려가는 삶이었다. 그 당시에 상사도 느꼈던 것 같다. 며칠 후에 상사에게 디자인 피드백을 받다가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상사가 나에게 ‘디자인에 열정이 없어요? 디자인에 열정이 없어 보여요.’라고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요. 열정은 있죠.’라고 반사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상사가 이어 그가 나를 채용하기로 했던 이유와 그가 보는 나의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고 ‘저는 00씨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쳤다. 사실 그동안 상사에게 많이 혼나면서 자신감도 떨어지고,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보는 상사가 너무 미웠다. 그러나 나마저도 나를 믿지 못하고 거의 포기를 했을 때에도 아직 나를 믿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상사였다.
그때를 기점으로 뒤집개로 전 뒤집듯 한순간에 내 마음도 바뀌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정의는 우리가 학문적으로 배운 정의가 아닌 스스로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정의다.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분야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디자인은 소비자의 경험이었다.
두 번째로 직업과 열정 사이를 조율해 보기로 했다. 나는 디자인이 매우 상업적인 분야라고 생각했고, 나 자신은 매우 예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분야에 교집합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열정을 느끼는지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현재 내가 담당하는 디자인 업무를 정리해보았고 내가 열정을 느끼는 일이 현재 업무의 어떤 부분에서 사용될 수 있는지 비교해보았다.
나는 예술가적 사고를 가진 디자이너다. 나는 세상이 원하는 것 보다 내 기호, 취향, 경험 그리고 깨달음에 따른 작업을 하는것을 좋아한다. 디자인은 전달이 중요한 직업이지만, 나의 디자인은 전달 보다는 표현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적절한 표현이 가미된 디자인은 전달의 도구로서 더 큰 효율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전달과 표현의 비중을 적절히 조절하여 작업하기로 하였다. 개인 작업에서 나는 학문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작업에 접근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능숙하였는데 이는 상업적인 디자인에서도 콘셉트만 맞는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세 번째로 디자이너로서의 목표를 잡았다. 잘 들리지 않는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소통의 통로 같은 역할을 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목표로는 잘 부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지금의 상황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목표였던 것 같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과 맞는 목표를 재설정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어떤 작업이든 좋은 작업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기였다.
여기까지 오자 드디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가능해졌다. 바로 멘탈 잡기였다. 사실 멘탈 잡기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FDSC의 디자인 학당 - 외부에서 교수님 및 디자인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을 초빙해와 디자인 관련 강의를 해주는 프로그램 - 과 디자인 서당 - 디자인에 관련된 글을 읽고 사람들과 2시간 동안 토론하는 프로그램 - 이다. 디자인 학당의 매들린 몰리 선생님의 강의에서 비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정승연 선생님의 강의에서 작업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배웠고, 디자인서당에서 각종 글을 읽으며 디자인에 대해 내가 의문을 가졌던 점들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디자인에 대한 비평과 같이 새로운 시각에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읽으면 당신도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과 디자인을 동일시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그랬고 ‘나 = 디자인’이라는 공식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실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거나, 디자인이 비판받으면 그것은 곧 나 자신의 가치로 직결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을 잘 완수해내지 못하거나, 디자인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경험과 숙련도의 차이일 뿐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의 가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나 자신을 더 이상 주변과 비교하지 않고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로 비교하는 시각으로 바꾸었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불안해지면 ‘내가 과연 잘하고 있나?’를 알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곤 했는데 이때문에 결국 자존감이 낮아지게 된다. 하지만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비교하게 되면 내가 얼마큼 발전했는지, 현재의 상황을 지속해도 되는지 알 수 있고, 남이 아닌 나와의 경쟁이기 때문에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나만의 페이스로 발전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 비교할 때와는 반대로 스스로 발전해 나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씩 자존감을 채워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처한 상황과 내 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주변 사람들은 많은 의견과 생각을 전달해주었고 내가 느끼는 부담, 걱정, 불안이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나는 사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끌어내 주었다. 함께 이야기하니 상사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고, 더는 움츠러들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실제로 다음 날 출근을 하였는데 마냥 두렵던 사무실이 더는 두렵지 않고 상사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열정을 찾았고, 이제는 나의 페이스에 맞추어 지난날보다는 조금 느리게 달려보려고 한다. 사실 아직도 조금은 방황하는 중이고 일에 대한 확신도 크게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지금의 방향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을 다잡았으니 이제 조금씩 변해가는 일만 남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변화하는 마음을 다잡는 데에 큰 도움을 준 퍼포먼스 예술가의 말을 끝으로 글을 이만 줄이려 한다. 모든 방황하는 디자이너들이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걸어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이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죠. 여러분은 그저 뭔가를 하지만, 그렇게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살다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해결책은 제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제가 알지 못하는 걸 하는 것입니다.”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이면 한국의 평범한 디자이너. 아직도 방황중이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함께 방황중인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깊은 사랑과 용기를 보낸다. @hyelimkoh
책임편집. 김세린
편집.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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