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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유미는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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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 ARTICLE
주제
생산
“저…. 안녕,월경컵 책 인터넷에 찾아봐도 다 품절이던데, 한 권 살 수 있을까요?”
“아, 저희가 개정판 작업 중인데 아직 완성이 다 되지 않아서요.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개정판이 언제쯤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올 하반기쯤에 나올 것 같습니다."
나는 마치 빚 독촉을 받는 사람처럼 옆에서 가슴 졸이며 통화 내용을 듣고 있다가, 태경이 전화를 끊자 삐죽거렸다. “하반기에 나온다고 말하지 말고,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지~. 그러다 하반기에 못 내면 거짓말하는 것 같잖아.” 벌써 책 구매 문의를 받은 게 과장 좀 보태어 100건은 된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독촉하지 않았지만 똑같은 문의를 여러 차례 받다 보니 괜히 독촉받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다.
『안녕,월경컵』은 월경컵을 처음 써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책이다. 2018년 10월에 첫 인쇄를 했고, 일 년 후 모든 수량이 팔렸는데 그 이후에 책을 다시 인쇄하지 않았다. 지금이 벌써 2021년이니, 책이 매진된 채로 일 년 반이 되어간다. 월경컵에 입문해보려다 어딘가 막막한 사람들이 책의 존재를 발견하고 사려고 해도 당장 살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따로 문의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물어볼 데도 없고,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한 것일 테다. 월경컵을 처음 쓰려고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막막해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당장이라도 책을 건네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나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처음 만들었던 책을 다시 그대로 인쇄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책을 처음 낸 후로 몇 년 사이 월경컵을 둘러싼 한국의 상황이 빠르게 바뀌었다. 불과 몇 년 전인 2017년에는 한국에서 월경컵을 구매할 수조차 없었다. 한국에서 월경컵을 사고파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월경컵을 써보려면 직접 본 적도 없는 물건을 영어로 된 웹사이트에서 주문해야 했다. 심지어 국내 회사에서 만든 월경컵을 미국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월경컵이 의약외품으로 허가를 받아 쉽게 월경컵을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만든 제품도 많이 출시되었다. 그러는 동안 책을 쓴 나 자신의 관점도 많이 변했다. 처음엔 나와 내 친구들이 어려워했던 부분을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책을 만들었는데, 책을 낸 이후로 몇 년간 월경컵과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 깨달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결국 내용을 손봐서 개정판을 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개정판을 내야겠다 마음먹은 지 일 년 반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구매 문의를 했던 사람들은 내 책의 존재에 대해서 지금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텐데, 나는 자꾸만 빚쟁이가 되어 도망 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어 어깨가 움츠러든다.
천지개벽의 순간
“월경컵 만든 사람 진짜 상 줘야 돼! 이 좋은 걸 왜 여태 몰랐나 싶더라니까. 진짜 너도 꼭 한 번 써봐. 한번 쓰면 일회용 생리대 쓰던 시절로 절대 못 돌아가. 생리를 아예 안 하는 거 같다니까? 생리할 때 냄새나고 밑이 간지러운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일회용 생리대 잘못이었다니, 진짜 어이없지 않아? 참, 우리가 한 주기 동안 흘리는 월경량이 얼만지 알아? 아니 글쎄 요구르트 한 병 정도밖에 안 된대~ 나는 무슨 우유팩 하나만큼은 흘리는 줄 알았다니까?”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월경컵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당시 월경컵을 처음 써봤는데 너무 편해서 이게 바로 천지개벽하는 거구나 싶을 정도였다. 월경 용품 하나 바꾼 걸로 삶의 질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이 놀라운 발견을 친구들에게도 알려야만 했다. ‘안전한 거 맞냐, 사람들이 안 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냐’며 친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몰라서 못 쓰는 거지 한 번 써보기만 한다면 나처럼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땀이 삐질삐질 나는 무더운 여름, 샤워 후 수건으로 대충 몸의 물기를 닦고서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채 선풍기 앞에 앉아 몸을 말리는 상쾌함을 월경 중에도 누릴 수 있게 됐을 때, 그 쾌감이란! 꿀럭꿀럭 월경혈이 나오는 신경 쓰이는 느낌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란! 피가 털에 엉겨 굳어가면서 털이 당기는 따가움도, 참을 수 없는 외음부 피부 간지러움도 월경컵을 쓰면서는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한 번 사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으니 지갑 사정에 도움 되기까지. 물건도 이런 물건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월경컵이 뭔지조차 모르거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직접 시도해보려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주변에 월경컵을 쓰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던 친구들은 나에게 카톡과 전화로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 월경컵을 쓸 때 그 과정이 쉽진 않았는데, 내가 겪은 어려움은 친구들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참 개성 있는 이유로 헤매고 있었다.
친구A : 이거 안 들어가는데? 여기가 질이 맞는지 모르겠어….
친구B : 이거 도대체 어떻게 빼야 해? 네가 똥 싸는 힘 주면 월경컵이 내려온다고 했는데, 나는 되려 올라가. 이러다 응급실 가게 되는 건 아닐까 너무 무서워….
아니 26살이나 됐는데 질이 어딨는지도 모르냐며 낄낄 비웃다가 정확하게 설명해 주려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외음부나 월경에 대한 책이나 자료를 찾기 너무 힘들었다. ‘월경'을 키워드로 도서 검색을 했을 때 나오는 책은 『월경의 정치학』이 유일했다. 이상했다. 내가 자료 검색을 잘못한 걸까 순간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임신이나 출산에 관한 책은 너무나도 찾기 쉬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점에 가서 찾은 의학 전문 서적에서 ‘월경’이라는 목차를 발견하고 두근두근하며 페이지를 넘겨보면, 하나같이 월경은 여성의 실생활의 일부로서가 아닌 임신이나 출산의 곁다리로서만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중, 여고, 미술대학을 다니며 여자들이 대부분인 환경에서 지내왔음에도 월경이란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되는 존재였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월경 용품을 사용하는 방법 대신 생리대에 묻은 피가 안 보이게 ‘예쁘게’ 접어서 버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생리대 광고에서는 파란 피가 묻은 ‘그날'을 보내는 순백의 여성이 나왔다. 아무도 “월경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지 마!”라고 하진 않았으나, 눈치로 다들 알게 되었다. 생리대가 없을 때면 짝꿍에게 귓속말로 ‘그거 좀 빌려줘'라고 했고, 찰떡같이 알아들은 짝꿍은 다른 친구들의 눈을 피해 책상 밑으로 몰래 생리대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에서 월경과 관련해서 실제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니. 지금도 대부분의 여성이 월경 이야기를 쉬쉬하며 지낸다니. 심지어 스스로 알아가고자 할 때도 참고할 책이나 자료조차 없다니, 아쉬움을 넘어 분노마저 들었다.
마침 퇴사한 후 태경과 함께 공동 대표자로 스튜디오 이름을 막 내건 참이었다. 그때 우리는 회사에 다니면서 누구도 유용하게 쓸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그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만드는 일을 반복해왔고, 밤낮없이 열심히 만든 결과물들이 일회성으로 쓰인 채 영원히 폐기되어 버려지는 과정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매우 소진된 상태로 퇴사를 한 후였다. 자연스레 스튜디오의 첫 작업으로는 꼭 사람들이 오래오래 쓸모 있게 써줄 것을 만들고 싶었다. ‘오호. 월경컵을 주제로 콘텐츠를 만들면 친구들도 그렇고 사람들이 유용하게 써주겠는데?’ 싶어 관련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미들의 탄생
그렇게 우리는 몇 년 동안 월경컵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월경컵 제품 정보를 찾기 쉽게 모아둔 웹사이트부터, 입문자를 위한 책, 월경컵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 운영, 상담 및 교육, 워크숍 운영, 마켓 참여 등 정말 다양한 일들을 해보았다. 이 시기 월경컵 관련 활동은 우리 스튜디오가 하는 일의 대략 90%를 차지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디자인 일 외에 다른 일을 해볼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시기에 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틀에서 벗어나 굉장히 다양한 역할로 살아볼 수 있었다. 디자이너 정유미, 강사 정유미, 가게 사장 정유미, 보부상 정유미, 작가 정유미 등등… 분신술을 한 것마냥 많은 ‘유미들’이 생겨났다. 새로운 일들을 하는 데는 새로 익혀야 할 것도, 낯설고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다양한 일을 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특히 직접 만든 콘텐츠를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반응을 볼 때의 쾌감이 정말 컸다. 회사에 다닐 때나 프리랜서로 디자인 작업을 할 때는 내가 만든 작업물들이 직접 사람들에게 쓰이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는데, 월경컵 관련 활동을 하면서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정보를 전달하다 보니 반응을 직접 볼 수가 있었다.
한번은 외부에서 했던 워크숍에서 모객이 잘 안되어 진행자분께서 근처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계시던 할머니들을 초청하신 적이 있다.
할머니 A : “나는 18살에 멘스를 시작했어."
할머니 B : “나는 17살. 그때는 다 좀 늦게 시작했어."
할머니 C : “우리 때는 생리대 요즘에 나오는 그런 거 쓰는 게 아니고 자투리 천으로 만들어가지고 썼어."
할머니 A : “맞어. 시부모랑 남편 몰래 빨래를 하느라 아주 힘들었지.”
보통 워크숍 초반에는 참가자들에게 초경 때 기억이 나는지, 어떤 월경 용품을 써봤는지 등을 물어봐도 쑥스러워서 시선을 회피하거나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는데 할머니들은 달랐다.
초경 시작 연도부터 본인의 경험담까지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주셨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계속하셔서 결국에는 진행을 위해 정리 멘트를 날려야 할 정도였다.
나 : “자,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경 얘기를 평소에도 자주 하시나 봐요.”
할머니 A,B,C,D,E : (서로를 쳐다보며) “아니…. 오늘 처음 하는 거야."
이렇게 평소에는 월경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 내가 만든 콘텐츠와 내가 하는 활동을 통해서 하나둘 본인의 경험을 꺼내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직접 보는 건 활동을 이어나가는 큰 동력이었다. 때때로 디자이너 유미로서 디자인을 잘 해내어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킬 때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자기효용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평소에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신체조건, 환경,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모두 다른 각자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콘텐츠를 계속 보충하는 과정은 이제껏 해오던 단발적인 디자인 작업에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혹사당한 유미들
언제부턴가 월경컵 관련 활동을 점차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유미로서 활동을 하면서 체력적, 정신적으로 점점 지쳐갔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많은 일을 하면서 우리가 하는 활동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은 가질 수 있었지만, 활동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그만큼의 수익으로 돌아오진 않았기에 본업인 디자인 일을 줄일 수는 없었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돌볼 시간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저.. 월경컵 구경해도 돼요?”
“네 물론이죠! 편하게 보시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제게 물어보세요~”
“우와 종류가 많네요. 어떻게 고르면 돼요? 질 길이를 알아야 한다던데…”
이렇게 시작되는 손님과의 질의응답은 길게는 네다섯 시간까지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긴 이야기 끝에 손님이 월경컵을 하나 사가더라도 내게 남는 돈은 겨우 만 오천 원 남짓. 만 오천 원 나누기 세 시간은 오천 원…. 아뿔싸, 10년 전 아르바이트할 때보다도 시급이 낮았다. 게다가 워크숍은 또 어떻고. 한 번 열면 6~10만 원 정도 벌 수 있는 일인데 매일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번거로운 점이 많았다. 참가자 모집을 위해 매번 포스터도 만들어야 했고, 인스타그램에 소개글을 써서 올려야 하고, 사람을 모집하고, 출석을 관리하고, 책상 배치를 바꾸고, 빔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음료를 준비하고. 사람들이 간 뒤에는 설거지와 청소를 해야 했다.
돈을 더 받아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애매했다. 상담의 경우에 “질문 10개에 1만 원이에요” 이럴 수도 없고… “시간당 2만 원이에요” 하기엔 왠지 비싸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돈을 받지 않음으로써 내 응대의 미숙함을 변명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렇게 손님 응대를 하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가게 사장이자 교육가로서의 유미가 퇴근을 한 후에는 디자이너 유미로서의 일이 시작되었다. 가게와 작업실이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작업 중간 불쑥불쑥 문을 여는 손님들이 있어 흐름이 끊기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또 저녁밥 먹을 시간이 찾아오고…. 하루면 끝낼 것 같았던 디자인 작업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새벽녘에 퇴근한 뒤, 아침이 되면 또 출근하고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무리한 생활을 이어갔다. 활동하면 할수록 몸도 마음도 시들시들해졌다. 틈만 나면 졸음이 쏟아져 피검사를 해보니 면역력이 아주 좋지 않을 때 생긴다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찾아온 상태였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라 정신과 약 처방도 받게 되었다. 지치고 약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업을 하고 있는 태경도 자주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일이 길어져 새벽에 귀가하는 날이면 반려묘인 여름이가 오랜 공복에 토를 하는 일도 있었다. 현타가 왔다. 디자인이냐 월경컵 활동이냐, 양자택일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양자택일의 순간
태경 : “이제는 두 가지 일 중에 하나에만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네가 월경컵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면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어. 다만 수익성이 좋은 방향으로 해야겠지만.”
나 : “아직 고민돼…. 근데 내가 만약 스튜디오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월경컵 관련 사업을 한다고 하면, 넌 개발자라는 직업을 버려야 하는데 괜찮아?”
태경 : “나는 내가 꼭 개발자는 아니어도 돼.”
본격적으로 맘만 먹으면 월경컵 관련 사업으로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태경이도 돈만 벌 수 있다면 괜찮다고 한다. 책을 내고 가게를 운영하면서, 한번 잘 만들어놓은 제품으로 계속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 달콤하기도 했다. 어쩌면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이 지긋지긋한 무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월경컵 관련 활동들을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디자인 스튜디오로서의 일에 더 집중하기로 정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로는, 월경컵 관련해서는 사업적 마인드를 탑재하는 게 어려웠다. 똑같이 초심자가 쓰기에 무난한데 A컵을 팔면 1만 원이 남고, B컵을 팔면 2만 원이 남는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컵을 팔겠는가? 사업적 마인드를 탑재했다면 B컵의 장점을 좀 더 어필해서 B컵을 팔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 어려웠다. 소비자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게 사업가라고 생각하냐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돈을 버는 게 최우선 목표가 아니겠는가? 모든 결정을 무조건 마진이 많이 남는 쪽으로 하진 않겠지만, 사업을 하다 보면 이렇게 약간의 뻥튀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디자인 일을 할 때와는 달리, 월경컵을 판매할 때는 스스로를 자꾸 사업가 쪽이 아닌 소비자 쪽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월경컵 제품 정보를 모은 사이트 역시 광고를 붙일 수 있었지만, 혹여나 내가 추천하지 않는 컵이 광고로 뜰 수도 있게 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수익을 위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제품을 추천하게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월경컵과 관련해서는 특정 기업과 사업적 연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소비자 입장에서 중립적인 정보를 생산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아무래도 월경컵 활동의 시작점부터가 소비자로서의 관점, 사용자로서의 관점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에너지의 방향이 안 맞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많은 수의 사람을 한 번에 만나는 걸 어려워하고, 외부 활동을 하고 나면 에너지가 빨리 방전되는 편이었다. 심지어 활동 초반엔 발표 울렁증도 있었는데 워크숍, 강연, 발표 등을 반복해서 하게 되고 명상과 약의 도움을 받으며 발표 울렁증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으나, 그렇다고 에너지가 덜 쓰이는 건 아니었다. 몇 시간 외부 활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선 뻗어 있어야 했다. 조용하게 혼자만의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할 수 있었던 디자인 일과 달리 사람을 직접 만나서 하는 일들은 잠깐만 하더라도 나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갔다.
이런 외부 활동들은 오히려 동업자인 태경과 에너지의 방향이 더 맞는 일이었다. 다른 일들은 “내가 PPT 자료 만들 테니 네가 발표해”라고 각자 더 잘하는 쪽으로 분업이 가능했지만 태경의 성별이 남성이다 보니 월경컵 관련 외부 활동만은 대신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같이 활동을 할 여성을 구하기에는 활동 자체가 수익성이 떨어지는 일이고. 결국 수많은 유미를 착취해서 어찌어찌 해결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대로 지속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행복한 유미들의 부활을 꿈꾸며
이렇게 2021년 우리는 월경컵 작업을 거의 하고 있지 않고 수많은 유미들은 다시 깨어날 기회를 꿈꾸며 잠들어 있는 중이다. 지금도 미련은 남아 있다. 지금 지내는 사무실에 이사를 오면서, 한구석에 월경컵 매대를 차려놓으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오프라인 스토어를 운영한다는 게 어려워지기도 했고, 다행히 운 때가 맞아 디자인 스튜디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다. 하루하루 굉장히 바쁘게 지내면서 월경컵 작업에 대한 생각도 잊혀 갔다. 그렇게 지금도 종종 ‘빚쟁이가 된 기분'을 계속 느끼면서도 책 개정판 작업을 아직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글도 ‘글이 게시되기 전까지 개정판을 내서 홍보 효과를 봐야지’ 다짐하며 쓰게 된 건데 역시 그때까지 개정판을 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활동을 하고 싶냐 묻는다면, 대답은 ‘노NO'다. 물론 월경컵과 관련해 활동한 것 자체를 후회하는 건 아니다. 기간의 제약 없이 온전히 나의 마음과 에너지를 써서 콘텐츠를 만들고, 실사용자를 만나 피드백을 받고, 콘텐츠를 점점 더 쓸모 있게 다듬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활동하면서 멋진 가치관을 가진 안전한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다.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 우리가 디자인 작업에 임하는 데 있어서의 태도에 영향을 많이 끼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월경컵 작업을 좀 더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월경컵 맛을 못 보고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 활동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이대로 묵혀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낸 다양한 유미들은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아직 내 안에 다양한 가능성과 함께 남아 있다. 물론 예전처럼 무턱대고 일을 벌여 수많은 유미를 양산하고 혹사시키지는 않을 거다.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밑 빠진 독에 붓지 않고 효율적으로 모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고, 유미들이 즐겁고 지속 가능한 정도가 어디인지 계속 살피고 적정선을 유지할 것이다. 천천히 그렇게 다시 해보고 싶다.
글쓴이 정유미 스투키 스튜디오를 공동 운영한다. 웹사이트, 인쇄물, 데이터 시각화 작업을 주로 한다. 월경컵을 사용해본 후 편리함에 화들짝 놀라 월경컵을 안 쓰는 사람은 있어도 못 쓰는 사람은 없도록 정보 전달 작업을 하고 있다. 책 『안녕,월경컵』과 『안녕,페미사이클』을 집필하고, 월경컵 전시/상담/피팅을 하는 공간 <안녕월경컵, 팝업스토어>를 2년간 운영했다. 성평등 강사 이수를 받았고 종종 월경 교육 강사로 출몰하기도. 인스타그램 @stuckyi.studio
책임편집. 노윤재
편집. 김나영, 김현중, 이예연, 하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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