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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는 왼끝맞춤에 대한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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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 ARTICLE
존경하는 독자·고객님.
저는 트위터에서 제가 디자인한 책에 대한 흥미로운 피드백을 보았습니다. “책 너무 좋다. 그런데 양끝맞춤 매우 필요하다.” “양끝맞춤 왜 안 해주나요?” 그리고 편집디자인 작업을 할 때 의뢰 고객으로부터 양끝맞춤으로 변경해달라는 요구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 요구에 의해 왼끝맞춤이 처단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디자이너는 판형과 글 상자의 면적, 그리고 내용의 성격과 길이에 맞게 배열 방식을 계획합니다. 양끝맞춤을 적용할 때도, 왼끝맞춤(오른끝흘림)을 적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끝맞춤보다 왼끝맞춤을 했을 때 유난히 불만이 많이 들립니다. 양끝맞춤을 요구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정확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그냥 불편하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저는 이 변론을 통해 디자이너가 왼끝맞춤을 선택하는 경우, 그 선택의 근거에 대해 호소하고자 하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양끝맞춤이란, 글줄의 길이가 모두 같고 왼쪽과 오른쪽 끝이 일정하게 정렬이 되는 활자 배열 방식이다.
왼끝맞춤(오른끝흘림)이란, 왼쪽 끝을 일정하게 맞추고 단어가 끊기지 않게 줄 바꿈 하여 오른쪽의 끝을 들쭉날쭉하게 배열하는 방식이다.

1. 왼끝맞춤을 하면 글자·단어 간격이 일정합니다.

양끝맞춤을 하면 글자 사이와 단어 사이 공간이 다소 불규칙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이 현상은 글의 단 폭이 좁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양끝맞춤은 주로 단의 폭이 충분할 때 읽기 적절합니다.
다른 언어의 경우를 살펴보면, 일문은 띄어쓰기 없이 모든 글자를 전각(가로와 세로의 길이 비율이 동일한 문자)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양끝맞춤을 해도 글줄 당 글자수와 간격이 일정합니다. 영문과 같은 로마자의 경우, 글자마다 가로길이가 다르고 속공간의 크기가 다른 서체가 많기 때문에 양끝맞춤을 할 경우 글자·단어 간격이 제각각인 사태를 줄이기가 한글에 비해 수월한 편입니다. 하지만 국문 텍스트에는 한글이 전각인 서체가 많이 이용되고, 전각이 아닌 띄어쓰기와 문장부호나 숫자 등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불규칙한 간격의 차이가 도드라져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왼끝맞춤은 양쪽 끝을 억지로 맞추지 않기 때문에 글자·단어 간격이 일정합니다. 적당한 폭과 길이의 글에서는 내용을 읽기 수월합니다.
이에 증인을 소환합니다.
[증인 1] 지하철 사인 이 지하철 사인을 보십시오. ‘강동’의 ‘강’과 ‘동’이 각각 양 끝에 맞춰져 있습니다. ‘강동’이라고 읽기까지 시선을 많이 움직여야 하고 비교적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이렇게 글자 수에 비해 글줄이 길 경우에 양끝 정렬을 하면 글자들이 생이별하여 읽기 불편해지는 참혹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출처: Google
[증인 2] 분식집 메뉴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인이나 메뉴판 등의 글자들은 세로쓰기 양끝맞춤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증거 사진을 보십시오. 글줄당 글자 수가 적은 세로쓰기를 할 때 양끝을 맞출 경우에는 ‘채치즈’, ‘알까돈’, ‘뽕치기파’, ‘김김김’, ‘밥밥밥밥’으로 읽히게 되는 극단적으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2. 단어가 끊기지 않습니다.

양끝맞춤을 하면 글자 간격과 단어 간격을 최대한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단어 중간에서 행이 갈리는 문장이 많습니다. 때문에 위 예시 글에서처럼 '서로를'이라는 단어는 '서'와 '로를'로, '한국에서'라는 단어는 '한국에'와 서'로 두 동강이 납니다. 이것들은 글을 읽고 쉽게 이해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대신 왼끝맞춤을 하면 단어별로 끊어져 행갈이가 되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곧바로 오롯이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이 왼끝맞춤의 대표적인 장점 중 하나입니다.
[증인 3] 화장실 안내문 ‘남자 장애인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안에 있습니다.’라는 문장에서 ‘남’ 다음에 행갈이 되어 ‘자’가 다음 글줄에 들어가게 된 이 사례를 보십시오. 의미상 중요한 부분인 ‘남자’라는 단어의 중간이 끊겨 있어 불편함을 초래합니다. ‘남자 장애인 화장실은 / 남자 화장실 안에 있습니다.’라고 단어가 끊어지지 않고 행갈이 되었더라면 더 명료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3. ‘다땡’을 잡지 않아도 됩니다.

양끝맞춤으로 조판을 하고 1차 교정을 한 뒤면 무릇 ‘다땡잡기’가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문단 마지막 줄이 ‘다.’처럼 한 글자로 끝나는 것들을 발견하면 바이러스를 퇴치하듯 분주하게 움직여 바로잡는 것입니다. 엉덩이에 난 종기처럼 튀어나온 한 글자를 윗줄로 욱여넣습니다. 이 과정에서 글자들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어 자간과 단어간격이 줄어들어 다른 문단과 차이가 나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왼끝맞춤을 적용하면 문단 마지막 줄이 한 글자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단어가 끝나는 지점에서 줄 바꿈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단이 두 글자 이상의 단어들로 깔끔하게 마무리됩니다.

4. 모양이 재미있습니다.

양끝맞춤은 한 화면/지면 위 네모난 글 상자 안에 반듯하게 들어차기 때문에 책장을 촤르륵 넘겨보면 고르고 정돈된 인상을 줍니다. 긴 글을 읽을 때는 이렇게 네모난 틀 안에 꽉꽉 들어찬 모양새가 연속되니 피로감을 덜어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시각적으로 지루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반면 왼끝맞춤은 오른끝이 흘러가는 모습이 유연합니다. 글이 차지하는 영역을 색칠해보면 오른끝이 곡선처럼 굽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면이 각자 재미있는 표정을 가지게 됩니다. 이 올록볼록한 오른 끝이 자아내는 인상은 글이 숨을 쉬는 듯한 생동감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 오른쪽에 생기는 여백으로 인해 흐릿해진 네모틀의 경계는 탁 트인 느낌을 주고 덜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독자·고객님.
어떤 이들은 왼끝맞춤이 글을 읽기에 더 편하다고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작은 불편들을 감수하고라도 텍스트가 차지하는 공간이 네모 모양으로 딱 떨어져 전체 화면이 정돈된 인상을 주는 양끝정렬을 선호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글의 성격, 글이 올라가는 화면의 환경에 따라 적합할 것 같은 정렬 방식을 선택할 뿐입니다. 다만, 미움을 더 많이 받는 쪽인 왼끝맞춤에도 좋은 점이 있으니 조금만 마음을 열고 살펴봐달라는 변호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글쓴이 우유니
1인 스튜디오 ‘O–O–H’와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에서 디자인하고 운영한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 열심회원이다. www.o-o-h.net
책임편집. 김나영
편집. 최지영, 노윤재, 김현중, 이예연, 하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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