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디자이너로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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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 ARTICLE

#출근하지 않는 디자이너

오전 9시 30분.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클라이언트로부터 문의나 소통을 위한 전화, 문자 연락이 시작된다. 자잘한 요구 사항 등을 오전 중에 처리하고 나면 점심시간 즈음이 된다.
오후 12시 30분. 연락도 점심시간이 되면 대부분 잦아들기 때문에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타이밍에 맞춰 점심을 챙겨 먹는 편이다. 집에서 일하며 가장 좋은 것은 눈뜨자마자 출근을 할 수 있는 것, 눈치 볼 것 없이 쉬거나 혹은 먹고 싶은 것을 그때그때 요리해 먹을 수 있다.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다시 책상에 앉아 업무를 재개한다. 분기마다 차이가 있지만 적게는 2~3개, 많게는 1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기도 한다. 클라이언트 업무 시간 중에는 여러 곳의 연락과 요구사항이 번갈아 오가는 경우가 많다. 새 프로젝트에 대한 신규 시안작업이나 중요도가 높은 디자인 작업은 긴 시간 지속적으로 몰두해 퀄리티를 높여야 하는데, 여러 연락이나 요구가 발생하면 흐름이 끊겨 작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반적인 퇴근 시간 이후 연락이 종료되고, 저녁 식사 후 오후 시간부터 업무를 처리하는 패턴이 생겼다.
써놓고 보니 잠자는 시간 빼고 일만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바쁠 때는 대개 그렇다. 의무적으로 챙기려고 하는 운동도 못 하고 취미도 매번 다짐뿐이다. 그래도 바쁜 일들이 몰리고 또 우르르 처리하고 나면, 많은 사람이 흔히 누릴 수 없는 황금 같은 시간 (예를 들어, 평소 웨이팅이 꼭 있는 맛집을 주중 애매한 시간 때 찾아갈 수 있는 것, 인기 있는 전시를 한가롭게 볼 수 있는 것, 늘 바쁘게 다니는 길을 여유롭게 걸어보는 것 등)이나, 충동적으로 훌쩍 떠나는 여행 같은 것들은 이 패턴에 중독되게 한다.

#1인 디자이너? 1인 스튜디오? 프리랜서?

처음에 일을 시작하고 이런 단어들을 들을 때 알쏭달쏭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관점에서 다른 점을 정리해보자면 1인 디자이너가 제일 넓은 개념으로, 조직에 속해있지 않고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를 총칭할 수 있고, 1인 스튜디오와 프리랜서는 비슷하지만 스스로 정의하는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1인 스튜디오가 개인과 작업을 분리해 마치 ‘법인’처럼 사람이 아닌 추상적인 사업상의 인격체 혹은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라면, 프리랜서는 이름 석 자를 걸고, 개인 = 작업 같은 개념이다. 프리랜서의 경우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고 원천징수로만 작업비용을 받는 일명 3.3 프리랜서와 사업자 등록을 한 프리랜서로 나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3.3 프리랜서를 ‘프리랜서’로 통칭하기도 한다.

#개인사업자

1인 디자이너로서의 시작이 처음부터 개인사업자는 아니었다. 첫 1년은 3.3% 원천징수를 떼고 페이를 받는 프리랜서였고, 의뢰 추이를 살펴보다가 점차 세금계산서 발행이 필수인 공공기관이나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1년이 되기 전 사업자를 등록했다.
프리랜서 5~6개월 차쯤 클라이언트로부터 세금계산서 발행과 사업자 등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듣고 미루다 결국 가까운 세무서를 찾았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금방 등록이 돼버려 허무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간단할 줄 알았다면 사업자가 없었던 초기, 클라이언트에게 세금계산서 발행 문의가 왔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고 바로 사업자 등록하면 됐을걸. 돌이켜보면 아까운 일을 꽤 놓쳤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카드 계산이 가능한 단말기도 갖췄다.

#나비효과

혼자 일한다고 소개하면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일을 받는지, 무슨 일을 받는지’ 이다.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한 후 독립하면 회사에서 쌓은 인맥과 기존 클라이언트와의 협업을 밑바탕으로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졸업 후 잠시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바로 1인 디자이너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클라이언트 풀이 없었다. 그런데도 별도의 영업 활동 없이 일을 이어 왔는데 돌이켜보면 학생 때부터 이것저것 벌인 외부 활동 덕분인 것 같다.
학부 시절 마음이 맞는 친구와 독립출판물을 주기적으로 내보기도 하고, 페어나 마켓에 자주 참가하며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됐다. 또 비영리단체에서 인턴을 경험하며 다양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더욱 많아졌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력이 다듬어지진 않았어도 디자인 전공생의 이런저런 작업물과 시도를 주변에서 편하고 재밌게 봐주었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예비 디자이너`, ‘준 디자인 전문가’ 정도로 인식된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시간이 밑거름되어 자연스럽게 나를 디자이너로 인식하고 있는 지인들이 늘어났고, SNS를 통해 프리랜서 선언과 포트폴리오 사이트 오픈을 알린 후로는 점차 작은 작업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좋게 마무리된 작업에서는 의뢰를 준 지인이 또 다른 지인에게 소개해 주면서 점차 개인에서 기관, 또는 회사로 클라이언트의 규모와 종류가 확장되었다.

#불안

1인 디자이너로 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불안과 친해지는 일이다. 당장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끝나면 무슨 일이 들어오고, 또 언제까지 진행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당장 다음 달에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전혀 계획할 수 없다. 게다가 사업을 다지면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및 폰트 등 각종 정기서비스를 갖춰야 하고 국민연금 및 건강 보험, 각종 공과금 등 고정 지출이 점점 증가한다.
한 명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처리하는 시스템에서 작은 사고나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것들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건강이나 신변에 심각하게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이 중지되고 클라이언트에게 피해가 생겨 경력에 대한 타격이 심각해지는 경우도 있어서, 현재 상황부터 먼 미래까지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다만 앞에서 불안과 친해지는 일이라고 했듯이, 불안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요소를 없애기 위해 뛰어다니고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 불안은 스스로 발전하게끔 하는 가장 원초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불안을 꼭 서글픈 것으로 생각하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히기도 하고 컨트롤하기도 하는, 늘 동행하는 존재처럼 여기게 됐다.

#FDSC

2018년 여름, FDSC(Feminist Designer Social Club)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SNS를 통해서 탄생 배경과 신청 양식을 보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던 것이 생각난다. ‘나에게 정말 정말 필요했던 거다!’하고. 스튜디오 이응셋을 운영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운영 초반 좌충우돌하며 당장 눈앞의 것들과 부딪히고, 경험치가 조금씩 쌓이면서 내가 가진 한계들을 실감하던 찰나여서, FDSC는 깜깜한 터널로 진입해 가는 순간에 한 줄기 빛과 같았다.
FDSC 초창기에는 나와 비슷한 1인 스튜디오 형태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이 있어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유용하고 실제적인 정보들을 공유했다. 슬랙(Slack)을 통해서 주로 온라인을 기반으로 활동했고, 일과 관련해 긴급한 정보나 노하우가 필요할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지식인 채널을 애용했다, #소모임 채널에서 회원들이 호스팅하는 여러 가지 목적의 모임에도 참여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친목을 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가지고 있던 건강과 운동에 대한 생각이 ‘운동 소모임’으로 이어져 지속해서 운영하는 대장을 맡기도 했고 (지금은 다른 회원이 대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FDSC블로그를 운영하는 #집필실 대장으로 활동하며 #편집국팀과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 FDSC운영진에 합류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혼자 커리어를 지속하며 가지게 되는 문제점들을 자발적으로 나누고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지는 고충, 페미니스트로서 가지는 생각과 해결하고 싶은 지점들을 안전하게 나누고 영향을 받으며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다.

#여자+1인 디자이너로 버티기

회사에 다니면 승진이나 이직이 있는데 개인사업자는 미래에 어떤 목표와 단계를 설정할지 막연해지는 때도 있다. 클라이언트나 업무 규모의 확장을 발전의 지표로 삼을 수도 있고, 개인으로 일하다가 어시스턴트나 직원을 고용하는 형태가 되며 조직으로 변화할 수 있고, 매력적인 곳에서 합류 제안을 받아 소속될 수도 있다. 또는 상상의 영역을 실체화하는 재능을 이용해 사업을 벌여 디자이너에서 사업가가 되는 일도 있다.
나는 어떻게 될까. 조직에 합류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고 일이 많을 때는 누군가와 힘을 합쳐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여러 변화를 시뮬레이션해 보았지만 아직은 혼자 일하고 있다. 명확한 이유 없이, 타고난 성향이나 본능 같은 것 아닐까 싶다.
또 하나, 홀로 시작했을 때, 많이 하게 됐던 걱정은 많은 여성 디자이너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10년, 2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고 묵중하게 자리 잡았을 때가 있다.
지금은 FDSC를 통해서 여성 선배들의 존재를 알아가고 또 알리면서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는 한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열심히 버텨 달라진 모습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40대 50대가 돼서도, 1인 디자이너이면서도 즐겁게, 그리고 그때는 조금 더 여유롭게 일하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버티고 있을 때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기에.
글쓴이. 이예연
‘이응셋’ 이라는 별칭으로 독립출판, 비영리 활동, 커뮤니티 오거나이징 이것 저것 활동을 벌이다 1인 디자이너(프리랜서)로 정착했다. 프리랜서 선언을 한 지 4년, ‘이응셋’을 사업자로 등록해 3년째 운영 중이다.
http://threecircl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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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편집. 최지영
편집. 김현중, 노윤재,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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