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출판업계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올해의 책은 현민의 <감옥의 몽상>이 받을 거야.ʼ
저자의 이름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주제도 내게는 몹시 생소했다.
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추천해 결국 책을 주문하게 되었다.
연분홍색 거칠한 표지 질감이 손에 착 감겼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렇게 출판계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까?
<감옥의 몽상>, 현민 지음, 돌베개
<감옥의 몽상>은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을 택한 30대 남성 사회학자가 쓴 책이다.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면, 저자 현민은 정치적인 이유로 군대 대신 감옥행을 택한다. 본인마저 선명한 언어로 이유를 댈 수 없었지만 확신에 찼던 선택.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감옥의 일상이 펼쳐진다. 24시간 동안 꺼지지 않는 형광등 속에서 잠을 청하며, 형과 아우라는 우애의 탈을 쓴 폭력적인 관계에 놓이고 이를 거부하면 동성애자라고 손가락질당한다. 스스로 뛰어든 징역살이에서 저자는 보고 듣고 몸으로 경험한 일들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담담한 어투 속에 가끔씩 묻어 나오는 감정의 북받침은 책의 매력을 더한다.
<감옥의 몽상>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건 이 처절한 감옥 생존기를 어떻게 아름다운 분홍색 표지로, 중세 정원의 창살을 떠오르게 하는 패턴으로 디자인할 수 있었을까였다. 고단한 감옥 생활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승화시키는 감각에 감탄했다. 책을 쥐고 세세하게 들여다볼수록 품이 많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코팅 + 거친 결감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코팅하지 않은 종이였다. 출판 업계에서는 관리 상의 이유로 표지를 코팅하는 것이 기본처럼 여겨진다. 때가 타고 종이가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고스란히 출판사에 반품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니면 비닐 래핑 공정을 추가해야 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가격도 꽤 큰 부담이다. 해당 출판사에 문의해보니 표지 종이로 빌리지 200g/㎡ 백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빌리지는 카탈로그나 초청장 등 고급 인쇄물에 쓰이는 단가가 꽤 높은 종이다. 종이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결감이 벽돌을 연상시킨다. 책을 만질 때마다 감옥의 벽을 쓰다듬는 기분이 든다. 디자이너는 이를 의도하고 빌리지 용지를 선택한 걸까?
두 가지 별색 + 먹 or 별색1 +4도
<감옥의 몽상>의 표지는 연분홍색 배경에 흰색 정사각형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검정색으로 화려한 패턴이 수놓아져 있다. 표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패턴의 일부가 은색으로 빛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몽상’이라는 단어와 함께 있는 무늬는 은색으로 반짝여 꿈결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창살 패턴과 형압 후가공
감옥의 창살을 형상화했다는 패턴을 따라서 형압(디보싱) 후가공이 들어가 있다. 덕분에 고급스러운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이 과감한 시도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데, 창살 모양이 복잡하여 인쇄물과 핀이 맞지 않은 경우 티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가공의 영역이 커 위 사진처럼 세로로 큰 자국이 생겼다. 종이의 평량을 더 높이고, 후가공 업체에서 좀 더 주의 깊게 작업한다면 다음 쇄에서는 해결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표지와 정체성이 이어지는 본문 디자인
본문에서도 표지에서 보여준 컨셉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 한글 서체는 신신명조를, 영문과 숫자 서체는 Cochin을 사용했다. 신신명조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면, 그 사이사이로 동판인쇄 양식에서 기반한 Cochin이 장식적인 느낌을 더한다.
본문 각주도 X자로 따로 모양을 만들어서 표지에서 쓰인 창살 패턴과 연결된 인상을 준다. 도비라도 표지 모양 그래픽과 각주의 X자를 활용했다. 1쪽부터 376쪽까지,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디자인한 것을 볼 수 있다.
돌베개와 박연미 디자이너
돌베개는 주로 인문서를 펴내는 출판사이다. <역사의 역사>나 <노무현 전집>시리즈처럼 디자인이 실험적이고 특이하면서 예쁘기로 업계에 소문나 있다. <감옥의 몽상>은 박연미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민음사에서 5년 넘게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인문과 문학 분야에서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멋지다’ 싶은 책의 앞날개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름이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열심히 메모해 작업에 반영한다는 박연미 디자이너, 그는 작업하는 책을 다 읽을까. “저도 디자이너이기 전에 한 명의 독자라 재미있는 원고는 단숨에 다 읽고 작업하지만 모든 원고를 다 읽게 되진 않습니다.(웃음)” 그래도 최대한 콘텐츠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목차를 꼼꼼히 살펴 큰 구조를 살피는 편이라고. 또 기본적으로 제목이 갖는 어감, 어절의 느낌에 많이 집중하며 작업하는 편이란다. “제목은 그 콘텐츠를 대표하잖아요. 저자와 편집자가 고심에 고심을 더한 결과물이고 독자가 책을 만날 때 맨 처음 읽어보게 되는 게 바로 제목이잖아요. 저는 그 제목이 주는 느낌, 환기력에 집중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 STREET H 그들의 공간이 궁금하다 – 067. 박연미 북디자이너 인터뷰 중에서”
그래서 ‘몽상’이라는 낭만적인 어감이 감도는 디자인이 나올 수 있었을까? 원고를 읽으면서 틈틈이 메모를 하는 디자이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원고가 가진 매력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풀어낸 것 같다. <감옥의 몽상>은 디자이너가 굉장히 세심하게 디자인했다는 게 느껴진다. 여러 조건들을 살펴보았을 때 결코 많은 판매가 예상되는 책은 아니다. 대중보다는 헤비한 인문 독자들이 읽을 법한 책이고 확산 독자층 또한 크지 않다. 그래서 이 제작사양을 모두 승낙한 결정권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컨펌이 되었을까 궁금해지는 이유다.
스스로 책을 디자인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디자인한 책을 분석하는 것이 배로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예쁘네, 역시 ◯◯◯ 디자이너야’ 한마디 정도로 넘어갔다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분석해보니 많은 공부가 된다. 나는 어떻게 디자인하고 있나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박연미 디자이너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역시 책은, 책 작업은 재미있다.”
글쓴이 김현중
북디자이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FDSC 편집부에서 활동 중이다.
책임편집. 노윤재
편집. 최지영, 김나영, 김현중, 이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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